

2018년 우리 정부가 시행한 ‘주 52시간 상한제’도 워라밸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일주일에 일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을 역으로 계산해 그 최소 기준을 52시간으로 본 것이다. 최근 정부가 이 주 52시간 근무제를 유연화시키겠다고 나서자 일각에서는 주 7일 근무 시 최대 일주일 80시간 넘게 일할 수도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워라밸이 우리 사회에서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이다.》
‘1만 시간 법칙’과 일론 머스크
워라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근거 중 하나로 ‘1만 시간의 법칙(10,000 Hour Rule)’이 있다. 세계적 저술가 맬컴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강조하며, 보통 사람의 범주를 넘어서 뛰어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1만 시간의 정교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창의적인 일을 하는 영역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필요로 하는 일들에 숙달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며 기초를 다지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워라밸에 반대하는 이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바와 동일하다. 특정 영역에서 전문가가 되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 이상의 절대적 투자가 필요하기에, 워라밸은 결국 실패자의 선택지라는 것이다.
일 개념 바꾸는 인공지능 시대

갈수록 진보하는 첨단 기술과 사회 시스템도 워라밸을 둘러싼 인식의 변화를 재촉한다. 올 초부터 세계를 뒤흔든 초거대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 열풍은 좋은 예다. 농경사회는 물론 이전의 산업화 사회에서는 부지런히 정답을 암기하고 부단히 노력하며 선대에서 쌓아올린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지식을 모으고 분석까지 해주는 인공지능 비서를 두게 된 시대가 바야흐로 오고 있다. 물리적 시간을 들인 노동이나 학습보다는 창의적 태도로 좋은 질문을 던지는 혜안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제품이 필요하면 3D 프린터가 만들어줄 수도 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차이는 실제로 뭔가를 연마하는 시간보다 신선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착상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제대로 보상받으면 일할 수 있다’
문제는 또 있다. 한국 딜로이트그룹이 2021년 발표한 ‘2021 밀레니얼과 Z세대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한국 밀레니얼 세대의 73%, Z세대의 76%가 ‘사회 전반에서 부와 소득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약 45%)는 그러한 불평등의 주요 이유를 ‘기울어진 운동장’, 즉 부유층에 호의적인 법, 규제, 정책에 있다고 지목했다.
어쩌면 지금 MZ세대들이 워라밸이란 키워드에 집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하기 힘든 시스템…. 거기 발목 잡힌 이들이 집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불확실한 미래의 보상보다는 현재를 즐기는 삶일 수 있다. ‘미센트릭(Me-Centric)’ 성향, 즉 상대적으로 타인을 의식하기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성향 역시 워라밸 집중 경향을 키웠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수의 타인이 바라봤을 때 성공으로 여겨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 현실을 희생하기보다는 자신이 그려봤을 때 의미 있는 현재의 삶을 소소하지만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원한다. 그런 삶도 어쩌면 MZ세대들에게 나쁘지 않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MZ세대가 게으르거나 성공에 관심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일한 만큼 돌려받는 공정한 보상, 노고만큼 보장받는 휴식이 있다면 근로시장 연장을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부동산 ‘영끌’에 나설 만큼 돈과 성공에 관심이 높은 세대들이 MZ세대다.
현 정부가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MZ세대 등의 의견을 보다 청취하는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연장 근무에 대한 휴식이든, 돈이든 과도한 일에 대한 ‘공정한 보상’을 명확히 약속한다면 어쩌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다. 불합리한 노동에는 단호하게 ‘No’ 하는 것이 요즘 세대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