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시간’ 성공보다 ‘내 삶’ 중요한 MZ세대[이승윤 워라밸의 심리학]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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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최근 들어 우리 언중(言衆)에게 가장 빠르게 정착된 신조어 중 하나가 ‘워라밸’이 아닐까 한다. 워라밸은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이다. 일에만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 것, 또는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개인이 가져야 할 가치관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2018년 우리 정부가 시행한 ‘주 52시간 상한제’도 워라밸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일주일에 일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을 역으로 계산해 그 최소 기준을 52시간으로 본 것이다. 최근 정부가 이 주 52시간 근무제를 유연화시키겠다고 나서자 일각에서는 주 7일 근무 시 최대 일주일 80시간 넘게 일할 수도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워라밸이 우리 사회에서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이다.》

‘1만 시간 법칙’과 일론 머스크


대체로 워라밸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쪽의 논리는 이렇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성공이라 부를 수 있는 높은 성과는 일정 시간 일에 집중화된 삶을 살아갈 때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세계 최고 부자에 오를 만큼 성공했다. 일주일에 80시간 이상 일하는 것으로 알려진 머스크는 워라밸이라는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대외적으로도 끊임없이 워라밸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그는 개인 트위터 계정에 ‘일주일에 단 40시간을 일하는 그 누구도 세상을 변화시켜 오지 못했다(Nobody ever changed the world on 40 hours a week)’는 메시지를 남기며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트위트를 인수한 뒤 “고강도 업무가 싫다면 트위터를 나가라”며 대량해고에 나서기도 했다.

워라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근거 중 하나로 ‘1만 시간의 법칙(10,000 Hour Rule)’이 있다. 세계적 저술가 맬컴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강조하며, 보통 사람의 범주를 넘어서 뛰어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1만 시간의 정교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창의적인 일을 하는 영역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필요로 하는 일들에 숙달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며 기초를 다지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워라밸에 반대하는 이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바와 동일하다. 특정 영역에서 전문가가 되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 이상의 절대적 투자가 필요하기에, 워라밸은 결국 실패자의 선택지라는 것이다.

일 개념 바꾸는 인공지능 시대

22일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노동자협의회 간담회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과 MZ노조 ‘새로고침’ 등이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22일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노동자협의회 간담회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과 MZ노조 ‘새로고침’ 등이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워라밸을 강조하는 쪽에선 이 ‘1만 시간의 법칙’이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도 없다고 주장한다. 일을 잘하기 위해 삶을 희생하도록 만드는 근거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대 연구진이 2016년 한 심리학회지(‘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한 연구 결과는 1만 시간의 법칙이 과장되었음을 지적한다. 연구진은 체육 분야에서 1만 시간의 법칙과 관련해 이뤄진 33개의 연구를 검토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노력이 성공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에 여러 요인 가운데 전체의 18% 정도만 기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연구진은 노력 이외에 타고난 재능, 성격, 환경 등이 성공에 있어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 근로시간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갈수록 진보하는 첨단 기술과 사회 시스템도 워라밸을 둘러싼 인식의 변화를 재촉한다. 올 초부터 세계를 뒤흔든 초거대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 열풍은 좋은 예다. 농경사회는 물론 이전의 산업화 사회에서는 부지런히 정답을 암기하고 부단히 노력하며 선대에서 쌓아올린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지식을 모으고 분석까지 해주는 인공지능 비서를 두게 된 시대가 바야흐로 오고 있다. 물리적 시간을 들인 노동이나 학습보다는 창의적 태도로 좋은 질문을 던지는 혜안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제품이 필요하면 3D 프린터가 만들어줄 수도 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차이는 실제로 뭔가를 연마하는 시간보다 신선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착상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제대로 보상받으면 일할 수 있다’


문제는 또 있다. 한국 딜로이트그룹이 2021년 발표한 ‘2021 밀레니얼과 Z세대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한국 밀레니얼 세대의 73%, Z세대의 76%가 ‘사회 전반에서 부와 소득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약 45%)는 그러한 불평등의 주요 이유를 ‘기울어진 운동장’, 즉 부유층에 호의적인 법, 규제, 정책에 있다고 지목했다.

어쩌면 지금 MZ세대들이 워라밸이란 키워드에 집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하기 힘든 시스템…. 거기 발목 잡힌 이들이 집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불확실한 미래의 보상보다는 현재를 즐기는 삶일 수 있다. ‘미센트릭(Me-Centric)’ 성향, 즉 상대적으로 타인을 의식하기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성향 역시 워라밸 집중 경향을 키웠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수의 타인이 바라봤을 때 성공으로 여겨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 현실을 희생하기보다는 자신이 그려봤을 때 의미 있는 현재의 삶을 소소하지만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원한다. 그런 삶도 어쩌면 MZ세대들에게 나쁘지 않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MZ세대가 게으르거나 성공에 관심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일한 만큼 돌려받는 공정한 보상, 노고만큼 보장받는 휴식이 있다면 근로시장 연장을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부동산 ‘영끌’에 나설 만큼 돈과 성공에 관심이 높은 세대들이 MZ세대다.

현 정부가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MZ세대 등의 의견을 보다 청취하는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연장 근무에 대한 휴식이든, 돈이든 과도한 일에 대한 ‘공정한 보상’을 명확히 약속한다면 어쩌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다. 불합리한 노동에는 단호하게 ‘No’ 하는 것이 요즘 세대다.

이승윤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워라밸#1만 시간 법칙#mz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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