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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아내의 마음새[이준식의 한시 한 수]〈180〉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09-30 03:00업데이트 2022-09-30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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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막 그림을 그리려다, 먼저 차가운 거울을 집어 듭니다.

놀랍게도 얼굴은 부석부석하고, 귀밑머리는 점차 성기는 것 같네요.

흐르는 눈물이야 그리기 쉽지만, 시름겨운 마음은 표현하기 어렵네요.

행여라도 낭군께서 절 깡그리 잊으셨다면, 이따금 이 그림을 펼쳐 보셔요.

(欲下丹靑筆, 先拈寶鏡寒. 已驚顔索寞, 漸覺빈凋殘. 淚眼描將易, 愁腸寫出難. 恐君渾忘각, 時展(화,획)圖看.)

―‘초상화를 그려 남편에게 보내다(寫眞寄外·사진기외)’ 설원(薛媛·당 말엽)


젊은 선비 남초재(南楚材)는 교제와 견문을 넓히겠다는 생각에 아내 설원(薛媛)을 남겨두고 유람에 나선다. 그러다 한 지방의 태수(太守)를 만났는데, 태수는 이 선비의 풍채와 재능에 반해 그를 사위로 삼으려 했다.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남초재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시동(侍童)을 고향집으로 보내 자신의 책과 거문고 등을 가져오게 했다. 시동이 와서 남편이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가져가려 하자 아내는 남편의 변심을 예감하고, 자기 초상화를 그리고 거기에 시 한 수를 덧붙여 보낸다.

얼굴을 그리려고 거울을 집으니 거울도 차갑거니와 마음이 더 씁쓸하고 냉랭하다. 거울에 비치는 부석부석한 얼굴, 듬성해진 귀밑머리는 오랜 이별이 안겨준 생채기일 테다. 치장하고 가꾸는 일이 다 부질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내는 붓질을 계속한다. 내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건 그려낼 수 있지만 수심 그득한 이 속내만은 담아낼 재간이 없네요. 행여 내 얼굴을 완전히 잊게 되면 그때 그림으로나마 한번 떠올려주세요. 낭군이 그립다고 해서 아내가 막무가내로 닦달할 수는 없었던 시절. 남편은 아내가 눈물을 머금고 초상화와 시를 보내오자 아내의 품으로 달려왔다. 남편의 변심을 원망하는 대신 완전히 잊지는 말아 달라는 당부에서 아내의 후덕(厚德)한 마음새를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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