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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강남에서의 호사[이준식의 한시 한 수]〈172〉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08-05 03:00업데이트 2022-08-05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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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모두가 강남이 좋다 하니, 나그네는 당연히 강남에서 늙어야 하리.

봄 강물은 하늘보다 푸른데, 꽃배 안에서 빗소리 들으며 잠이 든다.

술청 곁엔 달처럼 어여쁜 여인, 눈서리가 엉긴 듯 희디흰 팔.

늙기 전엔 고향에 가지 말지니, 고향 가면 분명 애간장이 다 녹을 터.

(人人盡說江南好, 遊人只合江南老. 春水碧於天, (화,획)船聽雨眠. (노,로)邊人似月, 皓腕凝霜雪. 未老莫還鄕, 還鄕須斷腸.)

―‘보살만(菩薩蠻)’ 위장(韋莊·약 836∼910)


당 말엽, 북방은 연이은 전란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웠지만 양자강 이남의 강남 지방은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여유로웠다. 고향을 떠나 강남에 머문 시인은 화려한 놀잇배에 기거하며 자주 술집도 들락거린다. 배 안에서 빗소리 들으며 잠들기도 하고 달처럼 예쁜 여인의 시중을 받으며 술도 마신다. 타향살이라도 이 정도 호사라면 늙도록 즐겨야지 굳이 귀향해서 무엇 하나. 고향에서야 강남에서의 이런 유락(遊樂)을 어찌 맛볼 것이며, 어여쁜 여인과의 교분이 끊어진다면 내 애간장이 다 녹아날 건 뻔하지 않은가. 모두 5수 연작으로 된 이 노래의 다른 구절에도 시인이 유흥에 탐닉한 흔적은 또렷하다. ‘새벽달 아래 대문 나설 때 여인은 눈물 머금고 배웅했었지’(제1수)라 했고, ‘이번에 다시 꽃가지(여인)를 본다면, 흰머리가 되도록 맹세코 귀환하지 않으리’(제3수)라 했다.

반면, 이 노래가 향락에 취해 허송세월하기 전에 서둘러 중원으로 돌아가 황제를 보필하겠다는 시인의 다짐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젊은 시절부터 절도사의 막료로 들어가 전란 진압에 앞장섰던 시인의 행보로 보아, ‘늙기 전엔 고향에 가지 말지니’는 귀환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에 대한 자조적 한탄이라는 것이다. ‘보살만’은 곡조명으로 내용과 무관하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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