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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中도 원조 주장 못 펴는 ‘고려 인삼’의 원천 기술[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22-07-08 03:00업데이트 2022-07-08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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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최근 한국과 ‘원조 논쟁’에 한창인 중국이지만 자신의 것이라고 말을 못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인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인들은 지난 2000년간 오로지 고려 인삼만을 최고로 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양에서도 근대 이후 인삼의 효과가 널리 알려져 인기가 높았다. 어쩌다가 인삼은 한국을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보약이 되었을까. 그 2000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2000년 전 中 기록에서 첫 등장

인삼은 약 2000년 전의 중국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그리 자세하지 않다. 중국에서 직접 캔 것이 아니라 멀리 멀리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인삼의 산지는 백두산 일대이다. 고조선 때부터 백두산 일대에서 얻은 모피를 중국과 널리 교역한 흔적이 있다. 그러니 이때에 모피와 함께 인삼도 교역하면서 중국에 알려졌던 것 같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인삼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삼국시대로, 고구려와 백제 등의 나라가 중국에 선물하는 진상품으로 널리 등장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인삼이 유명하다는 기록이 6세기경부터 나온다. 통일신라도 당나라에 인삼을 보낸 흔적이 있지만,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던 듯하며 심지어는 당나라에서 인삼을 받지 않았다는 기사도 있다. 아마 통일신라 때에 인삼의 주요 산지인 백두산 일대와 멀어져서 생산량이 적고 인삼의 저장 기술도 제대로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추운 지역에서 널리 나는 인삼은 발해가 성립되면서 새롭게 인정받는다. 신라의 인삼에 대한 기사가 8세기 말 이후에는 사라지고 다른 공물로 대체되는데, 바로 이때가 발해가 본격적으로 인삼의 주요한 거래자로 등장하는 시점이다. 발해는 시베리아 호랑이로 유명한 연해주의 시호테알린산맥과 백두산 일대로 확장했고, 이 지역은 바로 인삼의 산지였다. 일본도 8세기 초에 발해를 통해서 인삼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춥고 산이 험한 극동에 자리 잡은 발해였지만, 그에 맞는 특산품으로 무역의 이득을 얻었다. 다만, 인삼은 실제 고고학 자료로 밝히기 어렵다. 인삼 자체가 지금까지 보관되기 어렵고, 양도 적어서 어떤 분석을 해도 제대로 검출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의 발해 유적에서 그 인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인삼을 채취하는 도구이다.

발해 지역에서 발견된 인삼 등의 약초를 캐는 도구. 뼈로 만들어져 있다. 러시아 극동과학원 박물관 소장. 강인욱 교수 촬영
이 발해의 인삼 캐는 도구는 뼈로 만든 꼬챙이다. 발해에는 뼈가 아니라 질 좋고 튼튼한 철제 갈고리도 많았을 것이다. 최근까지도 인삼을 채취할 때 삼 종류는 쇠와 상극이어서 나무나 골제 갈고리로 파야 한다고 하니, 심마니의 전통은 이어지는 모양이다. 이 인삼을 캐는 도구가 발견된 발해의 유적은 공교롭게도 모든 발해 유적 중에 가장 북쪽에 있는 산악지역에 위치한다. 춥고 농사지을 땅도 부족한 이 지역에 발해가 성을 쌓은 것은 바로 모피동물이나 인삼 같은 특산품을 주로 수렵, 채취하고 교역하기 위한 것이다. 가볍지만 황금만큼 값어치 있는 이 지역의 특산품이야말로 발해가 성장할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원천이었던 셈이다.

청나라도 인삼으로 부를 축적


발해가 개발한 인삼과 모피의 위력은 바로 청나라로 이어졌다. 17세기 이후 급격히 성장하던 청나라의 건국 배경에는 인삼의 건조 기술이 있었다. 당시 조선만이 가지던 이 기술을 여진이 얻어냈고 누르하치는 수시로 월경하여 조선의 땅에까지 침범하여 인삼을 캐는 등 인삼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청 태종)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바로 만주의 인삼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대만 학자 장주산(蔣竹山)은 자신의 저서 ‘인삼의 제국’에서 인삼이야말로 청나라라는 거대한 제국을 움직인 물건이라 평했다. 조선에서 배운 인삼의 가공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지키고 세계와 무역하면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인삼은 세계사를 바꾼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최초의 동아시아 백과사전인 니콜라스 빗선 저서 ‘북동타타르지’에 실린 조선의 인삼 그림(왼쪽). 잔뿌리가 다치지 않게 조심히 캐던 당시 인삼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2008년 부산 원광사에서 불상 복장(腹藏) 유물로 발견된 인삼은 당시 탄소연대 측정 결과 약 1060년 전 것으로 밝혀졌다. 강인욱 교수 제공·동아일보DB
인삼의 효능은 동아시아에 그치지 않고 유럽에도 널리 퍼졌다. 이미 17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최초의 동아시아 백과사전인, 니콜라스 빗선이 지은 ‘북동타타르지’(타타르는 몽골 계통의 지역을 통칭)에 생생한 인삼의 그림이 등장한다. 그 잔뿌리 하나하나까지도 잘 남아있어서 뿌리 한 터럭 다치지 않고 캐서 약으로 쓰던 당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이 기록은 바로 하멜과 함께 한국에 표류했던 의사 맛회스 에이보컨이 준 것이다. 한국과 그 북쪽의 타타리아(시베리아와 북중국)의 험한 산속에는 눈이 사시사철 쌓여 있고 호랑이도 많지만 인삼의 뿌리가 있으니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캐서 일본, 중국과 교역한다고 기록했다. 근대 이후 구미 각국에 인삼의 열풍이 불었음은 설혜심의 ‘인삼의 세계사’에 잘 나와 있다.

인삼주와 바꾼 소련의 군사기밀


인삼은 20세기에 사회주의권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북한에서 ‘고조선 연구’라는 책을 써서 유명한 북한 학자 리지린(李址麟·1915∼?)과 그의 지도교수인 중국 역사학자 구제강(顧(힐,갈)剛·1893∼1980) 사이에도 인삼이 등장한다. 리지린은 1959∼1961년에 베이징대에 유학해 고조선에 대한 박사논문을 작성했다. 중국의 심장인 베이징대에 북한 최초로 유학한 그가 만주 일대가 한국의 역사적 영토라는 주장을 했으니 중국은 난리가 났다. 중국은 리지린을 학문적 간첩으로 규정했고, 그를 지도한 구제강도 간첩을 도와준 혐의로 큰 고초를 겪었다. 몇 년간 제자 잘못 만나 고생한 구제강이었지만 리지린이 졸업 기념으로 선물한 고려 인삼만은 애지중지했다. 그는 몇 년간 그 인삼을 아껴 먹다가 결국 마지막 인삼을 털어 먹으면서 “이제 인삼은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그나마 구제강은 낫다. 소련에서는 인삼주(人蔘酒)와 비밀 군사 기술을 바꾸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1970년 말에 지금은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에서 근무하던 푸슈카르라는 기술자는 당시 그가 근무하는 군수공장에서 연수하던 북한 사람들로부터 인삼주를 선물 받았다. 이 인삼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는 별생각 없이 당시 소련의 대표적인 대전차 미사일인 ‘팔랑가’의 도면을 건네주었다. 그 이후 결국 소련의 정보기관인 KGB가 그 사실을 알고 취조해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최고 군사기밀을 건네고 받은 것은 고작 인삼주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수용소에 끌려가서 1987년에 세상을 떴다. 그야말로 인삼의 치명적인 유혹은 냉전 시절 사회주의권에서도 대단했던 것 같다.

인삼의 정확한 약리작용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하지만 지난 2000년간 인삼을 둘러싼 이야기가 무궁무진할 만큼 그 약효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야말로 2000년을 이어온 극동과 세계를 이은 아이콘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명성은 단순한 입소문이나 플라세보(위약 효과) 때문이 아니라 실제 고려 인삼의 효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려 인삼만이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단순한 종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삼이 자라는 토양과 건조 과정에서 약효를 지속하는 방법, 그리고 약재로 만드는 등 한국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중국이 인삼의 기원을 중국이라 우기지 못하는 간단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가치를 알고 이용하는 것이 쓸데없는 ‘원조’나 ‘기원’ 논쟁보다 더 중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인삼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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