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식탁에서 사라지는 와인[정기범의 본 아페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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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파리에서 30년째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오너와 식사를 했다. 그날의 화두는 손님들의 와인 주문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는 것이었다. 레스토랑을 처음 열 당시만 해도 2인 테이블 기준으로 750mL 와인 한 병 정도는 주문했는데 지금은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했다.

지난달 10일 파리에서 개최한 프랑스 최대 규모의 와인 박람회인 ‘비넥스포’에 갔을 때도 보르도 와인 생산 업자들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3대째 와인 농사를 짓고 있는 한 농부는 보르도에만 4000여 개의 포도 농장이 있는데 이 중 3분의 1 이상이 포도 재배를 포기할 지경이라고 했다. 팔리지 않는 빈티지 와인을 하수도에 버리고, 쌓여가는 재고를 해결하기 위해 레드와인을 화장품 제조용 알코올로 바꾼다는 뉴스까지 접하니 프랑스 와인 산업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났다.

가장 큰 요인으로는 소비 감소가 꼽힌다. 프랑스 현지 매체 BFM TV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와인 소비량은 지난 20년간 20% 감소했는데, 특히 보르도 와인 소비량은 40년 전 대비 절반가량 줄었다고 한다. 1960년대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120L였는데 2020년에는 40L로 줄어 지난 60년 동안 70%나 감소했다는 ‘프랑스 와인 원산지 통제 명칭 위원회(CNIV)’의 발표는 더욱 충격적이다.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이 옹기종기 앉아 끼니때마다 식탁에 와인 병을 올리던 풍경이 점차 사라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핵가족과 1인 가구의 증가, 그리고 와인 가격에 부담을 느낀 젊은층이 맥주나 무알코올 음료로 갈아타면서 생긴 소비 패턴의 변화 등이다.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중국은 프랑스 와인을 사치품으로 지정해 병당 12%의 관세를 부과했고, 미국 역시 2019년 프랑스산 와인과 샴페인에 25%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는 동안 호주, 뉴질랜드, 미국과 같은 ‘제3세계 와인’은 꾸준히 품질을 향상시켰다.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위기에 처한 보르도 와인 생산자들은 지난달 마르크 페노 프랑스 농식품부 장관을 찾아가 정부의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정부에서는 1억6000만 유로(약 2243억 원) 규모의 농가 지원책을 발표했지만, 농민들은 와인 산업의 안정화를 위해 더 강력한 지원책이 필요하다며 쓴소리를 내뱉었다.

프랑스 와인 농장을 사냥하듯 사들이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 최근 외국인이 소유한 보르도 지역 와인 농장 166개 가운데 154개를 중국인이 사들였다는 내용이 전해지면서 프랑스인들은 경악했다. 이대로라면 보르도 와인 농장의 주인이 전부 중국인으로 바뀔 판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와인 업계는 늦서리와 기록적인 가뭄, 반복되는 혹서 같은 자연재해로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는 악재까지 겹쳤다. 이는 국민 식생활의 변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네 벼 재배 농가의 상황과도 비슷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머지않아 프랑스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인 와인이 식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는 이미 현실화 단계로 이행 중이다.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와인#정기범의 본 아페티#프랑스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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