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우경임]개츠비 곡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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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글로벌 금융위기 수습에 여념이 없던 2008년 말, 앨런 크루거 프린스턴대 교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듬해 초 출범할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을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였다. “경제가 망해 가는데, 큰일 한번 해보지 않겠습니까?” 이에 응한 크루거 교수는 2009∼2010년 재무부 차관보, 2011∼2013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다. 저명한 노동경제학자이자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브레인으로 활약했던 그가 18일 59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12년 1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그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할수록 계층 간 이동이 어렵다는 ‘위대한 개츠비 곡선’ 개념을 처음 발표했다. 빈농 아들에서 매일 호화파티를 여는 벼락부자가 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주인공 이름을 따온 것이다. ‘금수저-흙수저’처럼 얼핏 당연하게 느껴지는 명제를 실증적으로 입증했다.

▷각국의 개츠비 곡선을 비교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를 보면, 우리나라는 불평등 정도가 북유럽 국가에 필적해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계층 이동성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고 국민들은 실제보다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계층 이동성 지표와 주관적인 평가를 비교했더니 계층 상승 정도를 실제보다 20%포인트 낮게 평가했다는 연구도 있다. 부모 세대의 자수성가는 옛말이 된, “돈도 실력, 부모를 원망해”라는 소리가 횡행하는 시대가 낳은 좌절감의 반영이다.

▷크루거 교수는 최저임금, 기본소득 등 논쟁적인 연구에 천착했다. 1994년 뉴저지주에서 시간당 최저임금을 18% 이상 올렸지만 패스트푸드점 일자리는 줄지 않았다는 연구를 내놓아 찬반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런 그를 로런스 카츠 하버드대 교수는 “데이터가 이끄는 대로 연구한 사람”이라고 했다. 기존 경제학과 다른 길을 걸었어도 학자로서의 엄밀함과 치열함을 갖췄다는 평가다. “경제 정책을 추상적인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으로 여겼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렇게 애도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위대한 개츠비 곡선#크루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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