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행사가 된 현대차 파업… 그뒤엔 ‘노조 계파간 선명성 경쟁’[인사이드&인사이트/지민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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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조 8년 연속 파업 채비… 노선 서로 다른 계파 10여개
노조, 차기 선거 의식 ‘포퓰리즘 정치’… 잇단 파업 통해 최고수준 연봉 확보
使, 법-원칙 엄격 적용 않고 타협… 연평균 1조3485억 생산차질 빚어
前노조위원장 “내가 경영진이라도 해외에 공장 지을 것 같다”

지민구 산업1부 기자
지민구 산업1부 기자
“단체교섭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사측에 일괄 제시를 요구한 뒤 결렬 선언하고 파업하는 수순은 지양해야 한다. 파업의 영향력도 예전과 많이 다르다.”

지난달 19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에서 진행된 ‘2019년 임금 및 단체협약’ 16차 노사 단체교섭에서 하부영 현대차 노조위원장이 “임금체계 개편과 성과급 지급 등 회사의 단체교섭안 일괄 제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자 하언태 현대차 부사장은 작심한 듯 노조를 향해 이런 쓴소리를 했다. 하 위원장은 “더 이상의 공방은 의미가 없다”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노사가 단체교섭을 시작한 지 51일 만이었다.

단체교섭 결렬을 선언한 현대차 노조는 지난달 30일 전 조합원(5만293명)을 대상으로 쟁의행위 찬반 투표를 진행해 재적 기준 70.54%(3만5477명)의 찬성으로 안건을 가결했다. 중앙노동위원회도 1일 노사의 견해차가 큰 것으로 판단해 중재안을 제시하지 않는 ‘조정 중지’ 결정을 내렸다. 현대차 노조가 2012년부터 8년 연속 파업에 나설 채비를 갖춘 셈이다.

○ 파업으로 연평균 1조3485억 원 손실

현대차 노조가 2006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금속노조 산하의 산별노조(현대차지부) 형태로 전환한 뒤 파업 없이 단체교섭을 마무리한 해는 2009∼2011년뿐이다. 2012년부터는 매년 5월 노사 상견례, 7, 8월 노조의 단체교섭 결렬 선언 및 쟁의행위 찬반 투표 후 파업에 나서는 관행이 반복됐다.

22일 현대차에 따르면 2012∼2016년 사이 노조 파업으로 발생한 생산 차질 차량은 34만2000대로 금액 기준으로 7조3000억 원에 이른다. 이후 사측은 노조를 자극하지 않겠다며 현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업계에선 2017년 24차례, 지난해 2차례에 걸친 현대차 노조의 파업으로 총 2조1400억 원의 손실이 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종합하면 현대차는 7년 동안 파업에 따라 연평균 1조3485억 원의 생산 차질을 본 셈이다.

현대차의 실적이 이 기간에 빠르게 쪼그라들면서 파업은 더 부각됐다. 현대차는 중국 자동차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2012년 영업이익 8조4369억 원의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여파와 현지 수요 감소 탓에 지난해 영업이익은 2조4222억 원으로 6년 만에 71.3% 급감했다.

○ 관행적 파업으로 국내 최고 수준 임금 확보

노조가 무리한 조건을 내걸고 관행적인 파업을 통한 단체교섭을 이어간 것은 사실상 강경 투쟁이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기아차와 함께 글로벌 5위의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측 역시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생산량을 늘리는 것에 집중해 왔다. 노조가 당장 파업에 돌입하면 공장 라인이 멈추고 생산 물량이 줄기 때문에 경영진도 노조에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하지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던 것이다.

현대차 노조를 심층 분석한 ‘현대자동차에는 한국 노사관계가 있다’의 저자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노조 집행부는 파업을 통해 조합원들에게 존재감을 보이고, 경영진은 적절한 시기에 (파업을) 진화하면서 서로 이를 성과로 포장하는, 담합 형태의 공생 관계를 이어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사의 기형적인 공생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부터 시행된 해외 연수 제도다. 노사 합의로 우수 관리자와 조합원을 선발해 선진 자동차 시장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마련된 제도지만 사실상 단체교섭 타결 후 사측이 노조를 배려하는 형태의 복지 제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런 노사의 공생은 현대차의 임금이 1인당 생산성이나 영업이익 등의 증가와 상관없이 매년 늘면서 평균 연봉이 9000만 원을 넘는, 국내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된 배경이다. 그 대신 사측은 더 이상 국내에 공장을 짓지 않았다. 현대·기아차의 국내 신규 공장은 1996년 11월(현대차 아산공장)이 마지막이다. 기존 공장들마저 인력 개입이 최소화되는 최첨단 자동화 시설로 대체했다.

현대차 노조 창립을 주도하고 2대 노조위원장을 지낸 이상범 씨도 2017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경영진이라도 해외에 공장을 지을 것 같다”며 창립 초기와 달리 변질된 노조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2015년에 러시아 등 현대차의 해외 공장을 견학하면서 “신차 개발과 설비까지 다 해 놓고도 노조의 동의를 받지 못해 신차를 제때 생산하지 못하는 국내 공장의 현실과 비교됐다”는 내용의 이른바 ‘반성의 견학 보고서’를 뒤늦게 공개해 주목받았다.

○ 10여 개 노조 계파, 선거에서 ‘포퓰리즘’ 경쟁

노조가 매년 습관적으로 파업에 나서는 것은 2년마다 치르는 집행부 선출 선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대차 노조 내부의 계파는 10여 개로 사측을 대하는 입장에 따라 강성 중도 실리 등으로 분류된다. 각 계파는 선거에 위원장 등 노조 집행부 후보를 내고 당선을 위해 각종 공약을 내놓는다. 당선된 집행부 쪽의 계파는 2년 동안 진행한 단체교섭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 선거에서 재평가를 받는다. 사측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지 못하면 해당 계파는 차기 선거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를 잘 아는 각 계파는 파업으로 자신들의 선명성을 부각하고 차기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파업에 나설 수밖에 없다. 회사의 장기적인 성장보다는 자신들의 차기 집행부 입성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현대차 노조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현대차 설립 이후 노조는 한때 노사가 회사 생존을 위한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바뀌게 된다.

“1997년에 갑자기 외환위기가 발생한 뒤 대량 해고 사태를 겪으면서 현대차 노조는 민주화 등 사회적 이슈보다는 내부 문제에 눈길을 돌리게 됐다. 임금 인상과 고용 안정을 보장하는 계파에 몰표를 던지는 방식으로 이익 투쟁에 함몰된 것이다.”

2016년 울산 현장에 내려가 현대차 노조 등을 심층 연구한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는 저서 ‘가 보지 않은 길’에서 노사 대립이 심각해진 이유를 이렇게 짚었다. 송 교수는 “현대차 노조 내 계파들은 조합원의 표를 얻기 위한 임금 중심의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 정치에 매몰돼 있다”고 꼬집었다.

○ 여론 의식하는 노조, 행동으로 보여야

현대·기아차 노조는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뒤 12, 13일 각각 1차 중앙쟁의대책위원회를 열었다. 하지만 사측과의 집중 단체교섭 기간을 정하고 파업을 유보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 등으로 경제 여건이 악화된 상황에서 섣불리 일손을 놓았다가 여론의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을 우려해서다.

하부영 위원장은 20일 18차 단체교섭에서 “쟁의권을 합법적으로 확보했지만 국민 여론과 시선이 부담스러운 만큼 회사가 전향적인 안을 제시하면 형식적인 파업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대차 연구직 노조 관계자는 “내부에서 ‘귀족 노조’라는 외부 비판을 신경 쓴다. 투쟁 방식 등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갖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노조의 태도가 바뀔 것인지는 추석 연휴(9월 12∼15일) 전에 판가름 날 가능성이 크다. 추석 연휴 이후 차기 집행부 선거를 앞둔 현대차·한국GM 노조는 각각 다음 달 초까지 단체교섭을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기아차 노조는 21일 단체교섭 권한을 차기 집행부에 넘기기로 결정하면서 파업을 유보했다.

분규 없이 올해 단체교섭을 마무리한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SK이노베이션·만도·쌍용자동차 등이 꼽힌다. 특히 만도와 쌍용차는 임원 감축 등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한 가운데 그룹 총수와 최고경영자(CEO)까지 나서 노조를 설득하고, 노조는 임금인상 조건 등을 양보하면서 각각 7주 만에 속전속결로 단체교섭을 타결했다.

“시대에 맞는 노동운동을 개발하는 것은 결코 어용이 아니다. 많은 노조가 그런 노력은 안 하고 협상이 잘 안 되면 관성적으로 파업했다. 명분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을 노조가 스스로 개발하고 달라져야 한다.”

이정묵 SK이노베이션 노조위원장이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 대규모 하투(여름투쟁)를 예고한 자동차·조선 업계 노조도 새겨들을 만하다.

지민구 산업1부 기자 warum@donga.com
#현대차 파업#노조#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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