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의 밀리터리 포스]북한은 서해 NLL을 인정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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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당시 송영무 국방부 장관(앞줄 왼쪽)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를 펼쳐 보였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9월 19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당시 송영무 국방부 장관(앞줄 왼쪽)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를 펼쳐 보였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다시 찬찬히 들여다봤다.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체결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 얘기다. 자구(字句) 하나하나를 짚어가면서 북한이 과연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했는지를 정확히 따져보고 싶었다.

6개조 22항으로 이뤄진 합의서에서 ‘서해 북방한계선’이란 문구는 3조(4개항)에 딱 한 차례 등장한다. ‘남과 북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 군사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군사적 대책을 취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돼 있다. 청와대와 군은 이를 북한이 서해 NLL을 인정한 근거라고 주장한다. 합의문의 서해 NLL 명시를 북한이 ‘실질적 해상경계선’으로 수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이 4월 판문점 첫 정상회담부터 평양 정상회담까지 일관되게 서해 NLL을 인정했다고 했다.

그런데 영 꺼림칙하다. 올 7월부터 북한의 서해 NLL 무시활동이 되레 강화됐다는 군의 발표를 듣고서다. 북한은 최근까지 NLL 이남에 일방적으로 그어놓은 ‘서해경비계선’을 우리 함정과 어선이 침범했다는 부당통신을 지속하고 있다.

이를 두고 북한군이 여전히 서해 NLL을 무시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도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밑의) 실무자들은 아직 거기(NLL 인정)까지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수령의 교시를 목숨처럼 떠받드는 북한 체제에서 김 위원장이 합의한 내용에 군부가 ‘반기’를 드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북한이 NLL에 대해 ‘합의 따로 행동 따로’식 행태를 보이는 의도는 무엇일까.

북한이 전혀 다른 속내를 품었을 수 있다고 필자는 본다. 군사합의서의 NLL 적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향후 우리와의 협상에 시비를 걸어올 수 있다는 얘기다. 합의문 곳곳에서 그 빌미를 제공할 단초가 엿보인다.

우선 남북 정상 선언문과 군사합의서 어디에서도 NLL을 실질적 해상경계선이라고 기술한 대목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서해 NLL 일대에 평화수역과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는 목적이 ‘우발적 군사충돌 방지’라는 점이 유달리 강조된 측면이 있다. 자칫 서해 NLL의 존재 자체가 무력충돌의 원인인 것처럼 해석될 소지가 크다.

북한은 그동안 서해 NLL을 남북 충돌의 근원이자 ‘불법무법의 선’이라고 주장해왔다. 수시로 NLL을 침범하고 NLL 이남에 일방적으로 선을 그은 뒤 자기 수역이라고 ‘생떼’를 썼다. 제1·2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NLL 일대를 분쟁수역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릴레이 도발’도 감행했다. 서해 NLL이 ‘한반도의 화약고’가 된 것은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북한이 치밀하게 계획한 기습도발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fact)’다.

앞으로 북한은 서해 NLL이 적시된 합의문을 NLL 철폐의 요긴한 도구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남북 정상이 NLL을 우발적 충돌의 근원이라고 합의를 본 만큼 이를 없애고, 평화수역과 공동어로구역도 NLL과 서해경비계선 사이에 설정해야 한다는 궤변을 펼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장병과 국민이 희생된 과거 도발도 남측이 NLL을 고수하는 바람에 자초했다는 억지를 부릴 개연성도 있다.

합의서에 평화수역과 공동어로구역의 설정구역을 ‘서해 북방한계선 기준’이 아닌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로 기술한 것도 찜찜하다. 북한이 서해경비계선을 포기할 의도가 없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자꾸만 든다.

서해경비계선 관철은 2011년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업(遺業)이기도 하다.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서해경비계선을 내세워 노무현 대통령에게 NLL 포기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우리가 주장하는 군사분계선(서해경비계선)에서 물러설 테니 NLL과 그 사이를 공동어로구역이나 평화수역으로 하자”며 선심 쓰듯 양보하는 모양새까지 취하며 NLL을 지워버리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아들 김 위원장은 집권 이후 더 대담하고 과격한 도발로 서해 NLL 흔들기에 다걸기(올인)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한의 전향적 태도 변화가 확인되기 전에 NLL을 인정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본다. 북한이 부당통신을 즉각 중단하고, 서해 NLL 기준 등면적 해상에 평화수역과 공동어로구역 설정안을 수용하는 게 그 관건이다.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섣부른 기대와 예단은 득보다 실이 크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
#남북 정상회담#판문점 선언#서해 북방한계선#n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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