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의 갯마을 탐구]〈6〉장군은 왜 조기잡이 신이 됐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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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 영정.
임경업 장군 영정.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지난해 10개월간 머물렀던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서는 아찔한 기억이 있다. 썰물 때 잠깐 바다에 길이 생긴 틈을 타 인근 모이도에 들어갔다. 이곳은 ‘매∼’ 소리로 포효하며 섬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야생화된 염소 3마리만 있는 무인도. 밀물이 들어오기 전에 섬 정상을 가로질러 보기로 마음먹었다. ‘섬이 고향이고 한국 바다를 두루 누볐는데 이쯤이야.’

잠깐 섬을 둘러보고 나오려고 하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길은 온데간데없고 시커먼 거센 물살이 출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햄릿이 됐다. ‘무인도에 12시간을 갇혀 있다가 길이 다시 열리는 새벽에 탈출할 것인지, 허벅지까지 찬 물살을 뚫고 200m 바닷길을 건널 것인지’ 이것이 문제로다.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물살을 헤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바닷길을 걷는 동안 수심이 점점 깊어지고 있음을 느낄 정도로 물살은 빠르게 밀려들었다.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검푸른 물살로 바닥이 보이지 않아 공포감은 극대화됐다. 천신만고 끝에 섬을 탈출해 건너왔던 물길을 돌아보니 물은 거침없이 차오르고 있었다. 식은땀이 주르륵. ‘아, 과연 임경업 장군 전설이 서릴 만한 곳이구나.’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갔다. 이에 임경업 장군이 병사들과 함께 세자를 구하기 위해서 청나라로 가던 중 물과 식량이 떨어져서 연평도에 상륙했다. 병사들에게 가시나무를 모이도 주변 바다에 꽂아두게 했다. 썰물에 바닥이 드러나자 가시나무에 조기가 수도 없이 꽂혀 있었다. 이때부터 조기 잡는 법이 전파됐다는 것. 이후로 주민들은 연평도에 사당을 짓고 임 장군을 어업의 신으로 모셨다.

물론 이는 전설일 뿐 실제로는 훨씬 전부터 조기를 잡아왔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연평도의 토산(土産)은 조기이며 여러 곳의 어선이 연평도에 모여 그물로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민속신앙과 결부된 전설에는 민중의 역사 인식이 투영된다. 임 장군에 대한 당대 지배층의 인식이 어떠하든 민중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장군을 신격화시켰다. 임 장군 외에도 남이 장군과 최영 장군 등이 역사적 인물이 신격화된 예다. 이들은 민중의 기억 속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용맹한 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주술성과 결부되어 신(神)으로 승화됐다.

조기는 동중국해에서 월동을 하고 흑산도, 위도, 격렬비열도, 연평도 해역을 거쳐서 북한의 대화도까지 북상한다. 서해안 최대 어획 어종이던 조기가 사라지면서 연평도에서 평안북도의 대화도 해역으로 이동하던 조기의 길도 사라졌다. 남북은 26일 철도협력 분과회의에서 경의선·동해선 철도 현대화를 위해 공동 연구조사단을 구성하고, 북측 구간에 대한 공동 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육로의 개통과 더불어 조기가 이동하던 바닷길도 함께 복원하는 건 어떨까. 조기 떼가 남북을 오가고, 그 조기 떼를 따라 남북의 어선과 상선이 왕래하며 매매가 이뤄지는 바닷길이 되살아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연평도#임경업#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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