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우 칼럼]북-미 정상회담 성과, 아직 비관할 때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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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 끌려다닌 협상이지만
북핵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마지막 기회 살렸다는 데 의미
향후 핵물질 신고와 검증이 관건, 비핵화 위해서도 韓美공조 중요

천영우 객원논설위원·(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천영우 객원논설위원·(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지 한 달이 흘렀지만 그 결과에 대한 언론과 전문가들의 비판과 조롱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싱가포르 공동성명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만 본다면 낙관론의 근거를 찾기 어렵다. 북한이 요구해온 수교, 안전보장과 평화체제를 약속한 대가로 애매모호한 비핵화 공약을 받아낸 것까지는 13년 전 9·19공동성명의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으나 순서에서는 북한의 선(先)안전보장 후(後)비핵화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회견에서 불쑥 터져 나온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 선언과 주한미군 철수 용의 거론은 충격적이다.

비핵화라는 더 큰 목표 달성을 위한 신뢰 구축 차원에서 연합훈련을 잠정 중단할 수는 있지만 북한이 이에 부여하는 무게를 감안하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은 북핵 동결과 연계하는 것이 마땅하다. 더구나 트럼프는 북한의 논리대로 연합훈련의 성격을 도발적(provocative)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훈련의 정당성까지 부정하는 실수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주한미군 철수를 의제화함으로써 미군 철수 없는 비핵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대북 레버리지를 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선제적으로 약화시키는 악수를 뒀다.

한미 양국 정부로부터 과분한 평가를 받고 있는 북한의 5월 24일 핵실험장 폭파도 김정은이 4월 20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국가 핵 무력 완성으로 용도가 없어졌다고 인정한 시설을 서둘러 봉쇄하여 사찰관들의 현장 조사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미사일엔진 출력시험장도 이제 소용이 없음에도 북한은 폐기에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실제 핵무기 증강에 필요한 영변 핵 시설과 우라늄 농축 공장의 가동은 중단할 기미가 없다. 김정일이 같은 말을 두 번 팔아먹는 능력을 가졌다면 김정은은 죽은 말도 미국에 팔 수 있는 신통력을 갖고 있다.

거래의 달인을 자처해 온 초강대국의 대통령이 제재와 압박으로 벼랑 끝에 몰린 최빈국 지도자의 지략과 뚝심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닌 것은 기이한 일이다. 북한이 핵 능력을 계속 증강해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트럼프가 핵 위협이 이제 사라졌다고 우기는 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지난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은 동일한 합의 내용에 대한 북-미 간 해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합의한 것은 협상을 개시하자는 것과 의제뿐이고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마지막 기회를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 1라운드가 잘 풀리지 않았다고 게임에서 진 것은 아니다. 미국은 오류나 실패를 되풀이하고도 이를 흡수하고 만회할 여력이 있지만 북한은 벼랑 끝에서 묘기를 부리다가도 한번 헛발을 딛는 순간 벼랑 끝으로 떨어질 수 있다. 북한이 약속한 비핵화의 개념에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가 포함되는지를 확인하고 이를 관철할 수 있는 방법은 남아 있다.

하나는 합의 이행 방법과 순서를 명기할 로드맵 협상이다. 핵 폐기의 90%는 핵탄두의 해체와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 등의 반출, 핵물질 생산에 사용되는 농축 공장의 폐기, 그리고 영변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의 영구 불능화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조치를 미국의 어떤 상응 조치와 연계하려는지를 보면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의 실체는 밝혀진다.

또 하나의 시험대는 신고와 검증이다. 북한이 정직하게 핵무기 프로그램의 전모를 신고하고 완전히 폐기한다면 다시 핵무기를 만드는 데 1, 2년이 걸리지만 핵물질 보유량을 축소 신고하거나 농축 시설을 하나라도 숨길 수 있다면 ‘완전한 비핵화’ 이후 핵 무력 재건에 소요되는 시간을 1, 2개월로 단축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의심 시설과 관련 정보에 대한 제약 없는 접근을 보장할 검증 체제가 비핵화의 완전성과 불가역성(不可逆性)을 결정한다.

북한이 향후 로드맵 협상과 검증의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하면 싱가포르 합의는 파탄을 면할 수 없고 안전 보장과 제재 해제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는 김정은의 꿈도 수포로 돌아간다. 로드맵 협상과 검증의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제재와 압박을 더욱 강화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미련 때문에 한미 공조를 소홀히 하면 비핵화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외교적 해결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김정은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될 것이다.
 
천영우 객원논설위원·(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북미 정상회담#싱가포르 공동성명#북한 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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