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황]징벌적 손해배상, 도입해도 소송남발 걱정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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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잇단 화재 사건에서 보듯 현재 국내 법률 소비자보호 미흡
부작용 우려해 지나치게 막은 느낌
책임감 있는 기업은 걱정 안해도 돼… 기업 경쟁력 제고에도 도움될 것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여론의 주목을 받는 BMW자동차 화재 사건을 보면, 우리 국민은 세계적 ‘호갱’이 된 것 같다. 법제도가 그렇게 만들었다. 소비자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운전하면서 오직 자동차 회사의 점검 서비스를 기다리는 것 외에 별다른 대책이 없는 게 현실이다. 당장은 화재의 원인을 밝히고 생명과 재산 피해를 중단시키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선의의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과 재발 방지가 기본이다. 그런데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

2015년 폴크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 사건이 밝혀졌을 때, 미국과 캐나다 소비자들은 1인당 최대 1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았고, 회사가 지급한 피해보상액은 총 17조 원을 넘었다. 반면 국내 소비자들은 고작 100만 원 상당의 자동차 수리 쿠폰에 감사해야 했다. ‘죽음의 에어백’이라 불리던 다카타 에어백 결함 사건 때도 미국에서는 집단소송 결과 대부분의 자동차회사가 수천억 원씩 보상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소비자가 그런 보상금을 받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상상력 풍부한 작가들은 악덕 기업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극적으로 이기는 과정을 잘 그린다. 존 그리셤의 소설을 영화화한 1997년 작품 ‘레인메이커’는 백혈병 환자에게 보험금 지급을 악의적으로 거부하는 거대 보험회사를, 2000년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는 환경오염으로 암과 백혈병을 유발시키고도 은폐한 대기업 공장을 상대로 벌인 힘없는 피해자들의 법정 투쟁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정작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없었다면 이런 작품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제도는 기업이 악의적(willful or malicious)이고 반사회적인 불법 행위를 했을 때 적용된다. 기본적인 기업윤리와 책임감을 갖춘 기업들은 염려할 이유가 없다. 자칫 피해액의 몇 배에 달하는 배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결함 없는 자동차를 만들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효과이다. 이런 훈련을 거친 기업이 국제경쟁력도 갖추게 된다.

반면 악의적인 불법 행위가 오히려 이익이 된다면 기업들이 잘못된 행태를 고칠 이유가 없다. 유명한 미국의 1994년 맥도널드 커피 사건은 피해 할머니가 받은 46만 달러의 배상금이 과도하다는 시비로 제도 개혁 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이 소송을 통해 비로소 이전 10년간 700건이 넘는 비슷한 화상 사고가 있었는데도 맥도널드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이 드러난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 이후에야 3억 미국인이 이용하는 커피 컵의 디자인을 개선하고 경고 문구를 써넣는 등 화상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2011년 방송된 ‘뜨거운 커피’라는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당시 사건 경위가 대기업과 언론에 의해 많이 과장·왜곡되었던 사실도 밝혀졌다.

이 제도에 염려스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는 이에 대한 대비가 이미 넘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맥도널드 커피 사건과 같은 ‘횡재’를 노린 소송 남발에 대한 우려가 큰 것 같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손해액 인정에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한 우리 법원이 3배를 배상하도록 해봐야 일반인 상식을 기준으로 하면 실제 피해액에나 겨우 미칠 정도라는 것이 다수 법학자의 생각이다. 이 정도를 얻자고 개인 소비자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첨단기술과 대형 로펌으로 무장한 대기업을 상대로 기술적 결함과 악의를 문제 삼는 소송을 남발한다는 시나리오는 기우에 가깝다.

현재 제조물책임법 등 일부 법률에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장식에 불과하다. 일어날 가능성이 크지도 않은 부작용을 너무 걱정해서 손발을 다 묶었기 때문이다. 제조물책임법에서 재산상 손해를 빼버려 사람이 죽거나 다쳐야 비로소 소송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나, 한 세트로 작동해야 할 집단소송제도와 ‘디스커버리제도’(재판 개시 전 당사자 양측이 가진 증거와 서류를 서로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하는 제도)를 배제해 개인 소비자가 제 풀에 주저앉게 한 것은 지나치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발생한 수천 명의 영유아 피해에도 어찌 하지 못했는데, 자동차 화재야 별것 아닐 것 같기도 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기초적 책무이다. 출근길 운전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도록, 이번 기회에 제대로 작동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되기를 소망한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bmw#소비자보호#손해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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