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날아온 주주자본주의 반성문[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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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1대99 사회’의 적폐, 한국에선 ‘글로벌 스탠더드’

박용 특파원
박용 특파원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세운 127년 역사의 미국 간판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은 한국 대기업의 뒷목을 잡게 한 난제 해결에 영감을 주는 경영 교과서였다. 한국 기업들은 사업 다각화 전략부터 지배구조와 전문경영인 체제와 승계, 주주 중시 경영 등 선진 경영기법을 배웠다.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도 한성대 교수 재직 때 GE식 지배구조와 승계 모델을 언급하곤 했다.

그런 GE가 요즘 체면을 구기고 있다. 주가는 우리 돈 1만 원 아래로 맴돈다. 최근 ‘엔론 사태 이후 최대 분식회계’ 의혹에까지 휘말렸다. GE 측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지만, 의혹 제기 사실만으로도 모범생 GE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 후진적 지배구조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GE를 배우라는 훈수를 듣던 삼성은 미국 최고 기업으로 꼽히는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훌륭한 경쟁자”라고 견제할 정도로 건재하다.

공교롭게도 GE가 모범을 보인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도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미국 대표기업의 CEO 188명이 속한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은 ‘회사는 주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주주 우선 원칙을 삭제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대신 고객, 직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장기 주주 가치 등을 고려하는 ‘이해관계자(stakeholder)’ 경영 원칙을 선언했다. 주주자본주의가 무능한 경영진을 견제하고 성과 중심의 합리적 경영을 뿌리내리게 한 순기능이 있었지만 부작용도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단기 실적 중심의 근시안 경영, 장기 투자보다 주가와 배당을 우선하는 펀드 자본주의, 이 대가로 거액의 연봉을 챙기는 전문경영인들의 탐욕이 ‘1 대 99 사회’의 불평등을 키웠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주주자본주의가 득세한 기간 미 제조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말 감세를 해주자, 미 기업들은 주가 부양을 위한 자사주 매입에 열을 올렸다.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는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한국에도 수입됐다. 현재 한국 대기업들은 주주 가치 제고라는 명분으로 주식을 매입한 지 몇 달 만에 수조 원의 배당을 요구하고 주가 부양을 위해 자사주 매입을 강요하는 미국 행동주의 펀드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배당은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고, 장기 성장을 위한 투자를 하고, 세금을 내고 난 다음에 나누는 몫이다. 단기 투자로 ‘주식 알박기’를 한 다음 주주 가치를 내세우며 배당과 주가부터 챙겨달라고 위협하는 단기 투자자들은 어떻게 할 건가. 워런 버핏이 세운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나 정보기술(IT) 기업 구글 등은 차등 의결권을 도입해 경영권 위협을 막는 안전판이라도 갖고 있다.

한국 대기업의 주요 주주들이 외국인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배당=소득 분배’라는 미국식 소득 분배 공식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대기업에 배당을 압박할 때 뒤에서 웃는 이들은 따로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경영자들이 최근 관심을 갖는 이해관계자 중시 경영은 공동체 정신에 근거한 한국식 ‘유교 자본주의’ 가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한국 기업 경영이념에는 ‘사업보국(事業報國)’ ‘인화(人和)’ 등 주주자본주의에서 생소한 단어가 단골로 등장했다. 유교와 군사문화 잔재가 결합한 경직된 위계질서와 ‘황제 경영’의 독단, 위기관리 소홀 등 한국식 자본주의 적폐는 없애야 하지만 잃어버린 강점은 살려야 한다. 그러자면 기업 경영에 모범답안이 있다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착시’부터 걷어내야 한다.
 
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주주자본주의#펀드 자본주의#글로벌 스탠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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