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건혁]칠레 포도에 2년간 관세 부과 ‘깜빡’… 나사 빠진 정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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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혁·경제부
이건혁·경제부
기획재정부가 칠레산 수입 포도에 부과하게 돼 있는 관세를 2년 동안 누락해 10억 원 안팎의 관세를 징수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과 칠레는 2004년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며 국내산 포도 수확기인 5월부터 10월까지는 칠레산 포도에 45%의 관세를 매기고, 나머지 기간에는 무관세를 적용키로 했다. 하지만 기재부가 관세율표를 수정하기 위해 2015년 6월 FTA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칠레산 포도의 관세율을 시기에 관계없이 모두 0%로 낮췄다. 당초 시행령에 있던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만 무관세’라는 내용을 당국자가 실수로 삭제하며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이미 누락한 관세는 다시 징수할 수 없어 나라 곳간이 그만큼 비게 생겼다.

FTA 시행령에 명시된 품목이 약 20만 개나 되는 만큼 당국자가 일일이 관리하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무 부처가 시행령을 개정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확정하기까지 누구도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은 채 무사통과시켰다는 점에서 국가의 검증 시스템에 심각한 허점이 드러났다. 심지어 과일 수입업체들은 “2016년 5월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라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당국은 칠레산 포도에 관세 0%를 적용해 이미 납부된 관세를 환급해 주면서 관세사들에게 문제가 없다는 답변까지 남겼다고 한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서울세관의 한 행정관이 이를 발견한 뒤에야 시행령에 오류가 있음을 파악했다. 정부의 안이한 세정이 도를 넘어섰다.

기재부는 이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도 일부 실수가 있었다는 정도의 해명을 내놓고 있다. 단순 실수인 데다 누락한 금액이 많지 않은 만큼 너무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칠레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도 교역을 하면서 제대로 걷지 못한 채 포기한 관세가 더 있을지 모른다. 수입 품목별 관세 부과 실태를 철저히 검증해 과거의 실수를 밝혀내야 한다. 세금 하나 제대로 못 걷는다면 한미 FTA 협상을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인가.

미국과 중국은 지금 치열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가 치밀한 전략을 세워 대응해도 모자랄 판에 기본적인 통관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다. 일이 터질 때까지 몰랐다가 사안이 불거지면 실무진의 탓으로 돌리는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이 전쟁의 지휘권을 맡겨도 될지 우려스럽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관세#칠레산#수입#포도#fta#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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