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건이 김정일 앞에서 “금강산 안돼” 목소리 높인 까닭은… [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2일 14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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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이 런칭 100일을 맞는 이 기사를 기획하던 중 김정안 채널A·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이 요즘 미 행정부 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비핵화 라인에 포진한 김혁철 전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 박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을 함께 ‘쓰리 철’(Three chol)‘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번역 하면 ’3철‘인데 세 사람 이름 공통자인 ’철‘에 착안한 단어입니다. 애칭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김정은의 새 대미라인에 대한 미 행정부 한반도 관계자들의 관심과 기대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 워싱턴에서는 또 최근 북한이 김혁철의 새직함, 대미특별대표직을 비건 특별대표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에 대해서도 평가하는 분위깁니다. 올해 48세, 능통한 영어에 협상경험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김혁철을 ’특별대표 대 특별대표‘란 틀에 맞춰 모양새를 갖출 만큼 북한은 적극적 협상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김 전 대사는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일해온 전략통으로 분류됩니다. 박 부위원장은 대남 사업을 하는 통일전선부 출신이지만 유엔 북한대표부 참사 출신으로 미국 사정에 밝은 편입니다.

김혁철의 등장을 북한 국내정치적 시각으로 보면 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북한이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아니라 김혁철을 내세운 것은 ’최선희는 차관급이니 1급인 비건과 회담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담의 내용보다 격식을 중요시하는 고루한 북한 관료주의의 발현인 셈이지요.

하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북한 외부성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협상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치군인 출신으로 주로 대남 도발 공세에 전공을 가지고 있는 대남·정보기관장 김영철에서 핵협상 전문 외교 일꾼 김혁철에게 바통이 전달된 것입니다. 나이 든 김정은의 군사 가정교사 출신에서 젊은 엘리트 관료로의 변화기이도 합니다. 김혁철의 뒤에는 최선희와 이용호 외무상,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 등 외교부 전문엘리트 관료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이 지난달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북-미 고위급회담 대표단으로 미국에 다녀온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김혁철 전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 박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김 위원장 왼쪽부터)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이 지난달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북-미 고위급회담 대표단으로 미국에 다녀온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김혁철 전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 박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김 위원장 왼쪽부터)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북한 외무성, 특히 대미라인은 1993년 빌 클린턴 행정부 출범 직후 시작된 1차 북핵 위기 이후 무려 26년 동안 북한 지도부가 초강대국 미국을 도발과 대화라는 2중 전술로 우롱하며 핵·미사일 개발을 강행할 수 있도록 실무적으로 뒷받침해 왔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축적된 북미회담의 역사와 핵·미사일 개발의 기술적 지식들로 무장한 채 이번 협상에서 미국이 들고 나올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다양한 대응방안을 준비해 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김혁철 등 외무성 테크노크라트들은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에 대해서도 ’지적인 해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김정은이 어느 정도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치적 타협을 보고 싶더라도 테크노크라트들은 조목조목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며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최고지도자의 권위가 하늘과 같은 북한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지금까지 남북 회담의 역사 속에서 증명되는 것은 이들 테크노크라트들은 일상 생활과 의전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등 최고지도자에게 깍듯하게 충성을 보이지만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서는 ’할 말은 하라‘고 교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 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2009년 8월 묘향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배석했던 김양건 당시 통전부장은 김 위원장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남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훗날 한 당국자가 전했습니다. 결국 김 위원장은 금강산 관광 재개에 관한 조치들에 합의해줬지만 남측과 대화가 통하는 협상파로 알려진 김양건도 테크노크라트로서 할 말은 했던 거지요. 이처럼 독재국가인 북한에서 최고지도자, 즉 주인인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실제로 일을 하는 테크노크라트, 즉 대리인(속하게는 머슴)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국제정치학 교과서에서도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아직도 김정은이 말하는 ’비핵화와 경제재건‘이라는 국가전략이 진짜인지 아닌지 논의가 분분합니다만, 그것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평양 내부의 국내정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30년 가까이 월급을 챙겨준 핵문제가 끝나면 안 된다고 본 외무성의 조직적인 이해관계가 실무적인 협상을 방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비핵화와 북미관계 진전에 따라 점차 기득권을 잃게 될 군부가 방해를 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김정은이 정주년(5년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이 아닌 8일 제71회 건군절(인민군 창건일) 행사에 직접 등장해 ’엄지척‘을 연발하며 군부 달래기에 나선 것도 그런 우려에 따른 정치적인 행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올 한 해 워싱턴의 국내정치와 더불어 평양의 국내정치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김정안 채널A·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j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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