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원재]미투에 둔감한 일본, 외국 시선에는 촉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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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도쿄 특파원
장원재 도쿄 특파원
정치인이 정무직을 맡는 일본에서 사무차관은 관료가 갈 수 있는 최고 직위다. 특히 ‘최강관청’ 재무성의 사무차관은 모든 관료의 최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한 주간지가 후쿠다 준이치(福田淳一) 재무성 사무차관이 여기자들에게 “가슴을 만져도 되느냐”, “안아도 되느냐”며 상습 성희롱을 했다면서 녹음 파일까지 공개했다.

한국이라면 난리가 났겠지만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은 “구두 경고를 했다”며 심드렁했다. 조사도 처벌도 없다고 했다. 평소 ‘난민은 사살해도 된다’는 발상을 밝혀온 그의 인권 감각으론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재무성은 언론사에 ‘피해 당사자가 있으면 신고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는 식의 심드렁한 대응으로 다시 비판을 받았다. 결국 부처 전체가 벼랑 끝에 몰린 후에야 후쿠다 차관이 사임했다.

후쿠다 차관의 사임은 일본에서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MeToo·나도 당했다)’가 성공한 드문 사례다. 그동안 일본에선 세계적 미투 열풍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실명을 드러내고 피해를 밝혀도 바뀌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적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荒木경惟)의 뮤즈였던 모델 카오리(KaoRi) 씨가 인터넷에 원치 않는 노출을 해야 했다는 글을 쓴 것은 이달 초. 다른 톱모델이 응원까지 했지만 주요 언론과 아라키 측이 철저하게 무시하는 걸 보고 약간 놀랐다.

일본은 왜 미국 한국과 달리 미투가 지지부진할까. 최근 일본 미투의 선봉에 있는 이토 시오리(伊藤詩織) 씨를 인터뷰하며 집중적으로 물었다. 이토 씨는 2015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가까운 방송국 간부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자 지난해 실명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를 폭로했다.

그 후 그를 겨냥한 2차 가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의 수치, 꽃뱀, 한국계, 유흥업 종사자….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이 쏟아졌다. 가족과 친구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됐고 결국 영국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이토 씨는 “학창시절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했을 때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경찰에 피해를 신고하니 ‘원하는 언론계에서 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더라. 내가 일본을 떠나는 걸 본 다른 피해자들이 입을 열 수 있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언론에도 통하지 않는다. 일본 최대 신문은 이토 씨 기사를 한 건도 안 실었다. 한 여성 출판인은 “언론이야말로 남성 중심적”이라며 “주요 보직에 있는 남성들은 속으로 성폭력을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일본의 장점으로 ‘안정감’을 꼽는다. 사회 변동이 극심한 한국과 달리 변화가 크지 않아 적응만 하면 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정이 ‘필요한 변화’도 거부하는 수준이라면 문제다. 최근 스모 경기장에 응급 구조를 위해 올라간 여성 의료진에 “여성은 경기장에 올라갈 수 없다. 내려오라”는 방송이 나오고 상황이 종료되자 ‘부정 탔다’며 소금을 뿌린 것은 일본 사회의 뒤처진 시대감각을 보여주는 사례다.

어떻게 일본을 바꿀 수 있을까. 이토 씨는 “일본은 외부 시선에 민감하다. 지난해 110년 만에 형법을 고쳐 성범죄 친고죄 규정을 없앨 때도 유엔 권고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해외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칼럼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쿠다 차관의 사임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며, 일본을 바꾸려는 미투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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