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공유
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국제

바이든 연설 끝나자 회의장이 텅 비었다… “유엔총회는 죽었다” 비판[글로벌 현장을 가다]

입력 2022-10-06 03:00업데이트 2022-10-06 08:17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앞 광장에 제77회 유엔총회를 알리는 해시태그 조형물과 각종 안내판이 서 있다. 3년 만에 완전 대면 회의로 지난달 26일까지 열린 이번 유엔총회는 각국 정상의 총회 연설뿐만 아니라 정상 및 장관급 인사의 양자, 다자 회담 같은 이벤트가 이어지면서 ‘글로벌 외교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김현수 뉴욕 특파원
“잠시 후 러시아 외교장관과 회담이 있습니다. 우리 기자들이 어떻게 들어오면 되죠?”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 미디어 데스크. 양복 재킷에 세르비아 국기 배지를 단 세르비아 남성이 황급히 들어왔다. 세르비아와 러시아 외교장관 회담을 취재할 자국 기자들이 현장을 취재할 수 있도록 출입 동선을 물으러 온 것이다. 이날 유엔본부 안팎에선 주요국 정상, 장관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정을 맞추느라 각국 외교 당국자들이 급하게 오갔다. 유엔 관계자는 “그나마 유엔총회가 끝나가고 있어 숨 쉴 틈이 생겼다”며 “일반토의 첫날, 둘째 날이 가장 바빴다”고 말했다. 한국을 포함한 주요국 정상은 주로 첫날 기조연설을 한다.》

3년 만에 완전한 대면 회의로 열린 제77회 유엔총회 일반토의는 ‘외교의 슈퍼볼’이었다. 지난달 20∼26일 세계 정상 및 장관급 인사 157명이 이곳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유엔총회를 계기로 각국 다자 및 양자 회담도 수백 건 이어졌다.

어느 때보다 정상 교류가 활발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유엔이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과 개혁론이 힘을 받은 총회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갈라진 세계를 체감할 수 있었다.
바이든 연설 후 밖으로 우르르
유엔총회는 매년 9월 약 2주간 범(汎)지구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다. 각국 정상이 15분간 연설하는 일반토의 주간은 하이라이트다. 유엔 주재 각국 대사관은 자국 정상 연설 순번을 잘 뽑는 데 신경이 곤두선다. 1955년 이래 관행에 따라 브라질 정상이 가장 먼저 연단에 오른다. 모두가 1번을 꺼릴 때 브라질이 나선 것이 계기가 됐다. 미국 정상은 두 번째로 연설해왔다. 나머지는 온라인 선착순으로 정한다. 신청일이 되면 각국 대사관마다 긴장하며 ‘광클’(빠른 온라인 클릭에 몰두)한다고 한다.

외교가에 따르면 미국 바로 다음 순번이 기피 대상 1호다. 미 대통령이 연설을 끝내는 순간 객석에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버려 장내가 어수선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총회에서 한국은 10번째여서 비교적 주목도가 높은 첫날 오전 윤석열 대통령 연설이 생중계됐다.

지난달 21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는 동안 회의장 관람석이 각국 외교관들로 가득 찼다. 유엔 웹TV 캡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참석으로 일정이 밀리면서 올해는 둘째 날인 21일 7번째로 연설했다. 이날 오전 유엔총회 회의장은 이례적으로 3분의 2 이상 찼다. 보통 자신의 차례 30분∼1시간 전 회의장에 앉아 있다가 끝나면 퇴장하기 때문에 회의장이 텅 비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약 30분간 러시아를 규탄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혁 필요성을 강조하며 연설을 마치자 객석에 있던 상당수 외교관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순서인 에길스 레비츠 라트비아 대통령이 당황한 듯 뒤돌아서 의장석을 향해 무언가 말했다. 의장은 “여러분 앉아주세요”라고 당부해야 했다.

강대국 정상 연설 외에는 무관심한 유엔총회를 두고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유엔총회는 죽었다”며 정상 기조연설이 해당국 언론에만 관심 있는 국내용 행사가 됐다고 비판했다. 각국 정상이 유엔총회 연설을 자국 정치에 활용할 뿐이지 실제 글로벌 협업이나 변화를 이끌기에는 부족하다는 의미다. 유엔총회는 외교의 ‘계기’로 전락하고, 양자·다자회담 같은 ‘부대 행사’가 메인이 됐다는 비판도 있다.
美 국무장관 살인적 스케줄
올해 유엔총회 기간에 이런 부대행사들로 뉴욕시 전체가 ‘교통지옥’급 체증 몸살을 앓았다. 보안을 이유로 유엔본부를 중심으로 맨해튼 미드타운 동쪽과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곳은 통행이 막혀 걷는 게 빠를 정도였다. 행사마다 정상이나 장관 지각 사태도 속출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일정은 뉴욕이 글로벌 외교의 장(場)임을 실감케 했다. 블링컨 장관은 18∼23일 뉴욕에서 한국 일본 중국 영국 카자흐스탄 레바논 예멘 아르메니아 터키 이집트 외교장관과 양자 및 다자 회담을 했다. 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 장관급 회담, 태평양 장관회의, 아프가니스탄 여성 이코노믹포럼, 주요 7개국(G7) 만찬, 중앙아시아 5개국 장관회의도 있었다.

뉴욕 출신 블링컨 장관이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 광물파트너십 회담 등을 이어간 유서 깊은 팰리스호텔 앞 도로는 일반 차량 통행이 금지됐고 입구에는 보안검색대가 설치됐다. 롯데가 2015년 인수해 정식 이름은 롯데뉴욕팰리스호텔이지만 미 국무부는 보도자료에 팰리스호텔로 표기했다. 블링컨 장관은 한미일 장관회담이 열린 22일 저녁 갑작스럽게 부친상을 당해 본가가 있는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으로 향했다가 하루 만에 뉴욕으로 돌아와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했다. 부친상으로도 멈출 수 없는 외교 일정에 대한 의지가 엿보였다.

한국도 윤 대통령 일정과 별개로 한일 외교장관 회의, 한미일 장관회의, 한미 스타트업서밋 같은 다양한 부대 행사가 있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속에 윤 대통령은 글로벌 기업인들과 만나 한국 투자를 독려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일본 투자를 설파한 점도 눈에 띄었다.
‘안보리 개혁’ 목소리 나왔지만…
지난달 26일 막을 내렸지만 유엔총회의 ‘외교 성적표’에 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러시아가 있다.

유엔본부에서 이뤄진 러시아와 세르비아 외교장관 회담에서 양국이 대외 문제를 사전 협의하겠다는 협정을 맺자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우려를 표했다. 한국 대사와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세르비아 주재 미국 대사가 “현 시점에서 누구도 러시아와 어떤 것도 서명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자 러시아 측이 미국을 비난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번 유엔총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유엔 무대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불린 정상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포함해 서방 주요국 정상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규탄하면서 우크라이나 점령지 불법 병합 시도를 비판했다.

하지만 유엔에서 러시아 규탄은 그야말로 말뿐이었다. 거부권을 가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를 유엔 차원에서 제재할 방법은 없다. 지난달 말 미국이 러시아의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4개 점령지 병합 투표 강행을 규탄하는 유엔 차원 결의안을 상정했지만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채택되지 못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어서 유엔 창립 당시 상임이사국이 될 자격이 없었던 일본 독일을 이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올리고 싶어 한다. 반면 러시아는 그렇다면 인도 브라질도 상임이사국이 돼야 한다고 반격한다. 중국도 속내가 다르다. 결국 안보리 개혁은 그저 공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유엔 안팎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다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는 무능함을 그대로 드러낸 유엔이 그나마 이후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봉쇄해 막혔던 흑해 곡물 수출 길을 7월 다시 여는 데 한몫했고, 유엔 산하 국제원자력기구가 러시아군이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사찰을 실행해 핵 재난 우려를 차단한 것 등이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유엔의 실패는 국가 간 갈등이 심각해서다. 유엔을 괴롭힌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 kimhs@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국제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