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대피하라더니” 삭제되는 기록들…러시아 ‘미사일 폭발사고’ 미스터리

  • 뉴시스
  • 입력 2019년 8월 25일 0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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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북부서 폭발 사고 후 방사성 물질 수치 20배 상승
美 정보당국 "러, 핵추진 순항미사일 시험 추정"

지난 8일(현지시간) 러시아 북부 아르한겔스크 주(州) 세베로드빈스크 지역 ‘뇨녹사’ 훈련장에서 러시아 국방부와 원자력공사 로스아톰(ROSATOM)이 함께 시험하던 신형 미사일 엔진이 폭발했다.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액체 추진 로켓엔진 시험 도중 사고가 발생했다”고 설명하며 “2명이 사망했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미사일 시험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 폭발 사고라는 것이다.

국방부는 사고와 관련한 세부적인 사항을 밝히지 않은 채 “대기 중에 유출된 유해 화학물질은 없다. 방사능 수준은 정상이다”고 발표했다.

세베르드빈스크 시 당국은 “오전 11시 50분부터 12시 20분까지 방사능 수준이 시간당 2 마이크로 시버트(μSv)까지 높아졌다”며 시간 당 최대 허용치인 0.6μSv의 3배 이상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상승이었을 뿐 방사능 수준이 급격히 내려가 정상 수준을 회복했다며 “주민들의 건강에 위협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10일 현지 언론사가 내놓은 로스아톰 관계자와의 인터뷰는 국방부의 발표와 사뭇 달랐다. 이날 사고로 로스아톰 소속 과학자 5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는 것. 이 관계자는 “로켓 추진 장치에 사용할 핵분열성 물질을 활용한 소규모 에너지원을 연구하던 중 소형 원자로가 폭발했다”고 사건을 설명했다.

이 5명의 사망자가 첫날 국방부가 발표한 2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것인지 명확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미국 언론들은 이 사고로 로스아톰 소속 과학자 등 7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군인 3명과 로스아톰 직원 3명 등 총 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러시아 비상대책부 자료를 인용해 사고 직후 세베로드빈스크의 방사성 물질 수준이 평상시의 20배까지 높아졌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 러시아, 핵추진 순항미사일 ‘스카이폴’ 시험했나?

베일에 쌓여있던 폭발 사고는 12일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미국 정보당국을 인용해 “러시아가 신형 핵추진 순항미사일 시험 중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보도와 함께 윤곽을 찾아갔다.

미 정보당국은 이번 사고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SSC-X-9 스카이폴’이라고 명명한 신형 순항미사일의 시제품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작년 3월 국정 연설에서 스카이폴, 러시아명 ‘9M730 부레베스트닉’을 언급하며 “신형 핵추진 순항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 “지구 어디든지 도달할 수 있는 천하무적”이라고 자부한 바 있다. 올해 2월에는 관련 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도 밝혔다.

만약 러시아가 시험하던 것이 소형 원자로를 동력으로 하는 스카이폴이었다면 “소형 원자로가 폭발했다”는 로스아톰 관계자의 설명도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12일 트위터에 “러시아의 ‘스카이폴’ 폭발로 사람들이 그 시설 주변과 그 이상의 공기를 걱정하게 됐다. 좋지 않다!”며 다시 한번 의혹에 확신을 부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러시아에서 실패한 미사일 폭발에 대해 많이 파악하고 있다. 우리는 비슷하지만 더 진전된 기술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크게 자존심을 구긴 셈이다.

다음날인 13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은 이미 (핵추진 미사일) 분야에서 러시아의 수준이 다른 국가들이 따라올 수준을 훨씬 앞서고 있다고 여러차례 말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을 반박했다.

◇ “주민들 현장에서 대피하라더니”…삭제되는 기록들

사고가 발생한 세베로드빈스크 시는 사고 엿새째인 14일 마을 주민들에 “집을 떠나라”며 대피령을 내렸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에 따르면 세베로드빈스크 시는 “훈련장에서 벌어진 사건(event)으로 인해 14일 대피를 명령한다”고 밝혔을 뿐 구체적으로 어떠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언론의 보도가 잇따르자 주민 대피령은 빠르게 취소됐다. 세베로드빈스크 시장은 현재 휴가를 떠나 자리를 비운 상태다.

명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혼란한 상황에 지역 주민들은 시 온라인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 서로 질문을 주고 받으며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한 주민은 “지금 게시판에는 100만 개의 질문이 올라왔으나 아무도 답을 하지 않는다”며 “왜 시장은 나타나지 않는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방사능의 공포에 지역 주민들은 약국에서 요오드제를 사재기하며 자력구제에 나섰다. 요오드제는 방사성 물질이 갑상샘에 축적되는 것을 예방하는 의약품이다.

사고 피해자를 치료한 의료 기록도 삭제되고 있다.

16일 모스크바타임스는 “사고 피해자를 치료한 의사 중 1명에게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고 보도를 전했다.

피해자들이 이송됐던 병원의 의료진에 따르면 이들은 이날 오후 4시30분께 알몸 상태로 반투명 비닐백에 싸인 채 병원에 도착했다.

한 의사는 “병원 지도부, 보건부 담당자, 지역 정부 공무원, 주지사 등 누구도 환자들이 방사능에 노출됐다는 언급은 없었다”며 보호구 없이 이들의 치료에 나섰다고 말했다.

보안당국은 의사들에게 치료 내용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했다고도 그는 전했다. 또 다른 의료진은 이들이 병원을 방문해 사고 관련 기록을 모두 삭제했다고 증언했다.

러시아 방사성 물질 관측소 일부는 폭발 사고 이후 방사능 수치에 대한 정보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유엔 산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의 라시나 제르보 사무총장은 19일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사고 이틀 후인 10일 폭발 현장 인근의 두브나와 키로프의 관측소가 데이터 전송을 중단한 데 이어 13일 빌리비노, 잘레소보의 방사성 관측소도 자료를 보내지 않고 있다”고 발언했다.

핵실험전면금지조약 위반 행위를 감시하는 CTBTO는 80개 이상의 국가에서 대기중 방사성 물질을 관측하는 방식으로 핵실험 여부를 확인한다. 그러나 관측 데이터를 CTBTO로 보내야 한다는 법적 의무는 없어 현재로서는 각 관측소의 ‘선의’에 의해 감시가 이뤄지는 실정이다.

핵 전문가들은 러시아 방사성 물질 관측소의 자료 전송 중단은 증거를 은폐하기 위한 정부차원의 대응으로 보고 있다.

◇ INF 폐기…미국-러시아 ‘핵 군비 경쟁’ 포문 열었나?

이달 2일 미국은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87년 구 소련(러시아)과 체결한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에서 공식 탈퇴했다. 러시아 역시 INF는 사실상 폐기됐다고 밝혔다.

INF 조약으로 미국과 러시아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500∼5500㎞의 중·단거리 미사일 2692기를 없앨 수 있었다. 이후에도 INF 조약은 양국의 미사일 개발경쟁을 억제하는 안전핀이 됐다.

NYT는 이번 사고를 놓고 “지난 30년간 중단했던 핵 군비 경쟁이 재개되려는 위기의 순간 발생했다”고 해석했다.

로스아톰의 알렉세이 리하초프 사장은 12일 열린 사고 희생자의 추모식에서 “신무기를 빠르게 완성하는 것이 고인들에 대한 도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국의 과업을 이행하고 있으며 조국의 안보는 확실하게 보장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 러시아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그 목표점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 러시아보다 진전된 기술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던 미국은 18일 오후 사거리 500㎞가 넘는 순항미사일 시험 발사를 실시했다.

이달 초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INF 탈퇴 후에 아시아 지역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싶다고 공언한 바 있는데 이날 실험은 아시아 미사일 배치의 전초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이 발언한 ‘아시아 국가’에는 동맹국인 한국도 포함돼 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에 대해 “검토한 적도 없고 앞으로 계획도 없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호주·필리핀을 비롯해 한국에도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압박한다면 과연 우리 정부가 이를 언제까지 거부할 수 있을지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에스퍼 장관이 아시아 국가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싶다고 했던 시기는 INF 조약 탈퇴 후 ‘몇 달 이내’다. 양국이 INF 조약 탈퇴한 지 벌써 1달이 되어간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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