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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되면 동지도 판다… ‘프리랜서 스파이’가 뒤흔든 국가안보[인사이드&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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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되면 동지도 판다… ‘프리랜서 스파이’가 뒤흔든 국가안보[인사이드&인사이트]

신동진 사회부 기자 입력 2019-07-19 03:00수정 2019-07-1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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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사건’으로 본 한중일 첩보전… 정보사 출신 민간 첩보원 ‘흑룡’
무역업 위장… 황장엽 암살 막기도… 中에 발각되자 이중스파이 변신
국정원 블랙요원 명단 넘기고 日 대사관 무관에 군사기밀 팔아
첩보활동 안하는 나라 없어… 외국 스파이 적발해도 처벌 난감
이중간첩 논란이 된 흑금성을 다룬 영화 ‘공작‘
신동진 사회부 기자
“(첩보의) 소스는 확실합니까?”(북한 관련 단체 대표 L 씨)

“병원 내부 직원 협조자가 제보.”(정보기관 출신 첩보원 H 씨)

2014년 11월 주한 일본대사관 무관 등을 상대로 ‘정보 장사’를 하던 탈북자 출신 L 씨는 북측 핵심 인사의 숙청과 사망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흑룡’(암호명) H 씨에게 텔레그램 메신저로 SOS를 쳤다. 국군정보사령부 공작팀장 출신인 H 씨는 군복을 벗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늘 ‘고급 정보’를 쥐고 있었다. 정보사에 그를 돕는 내부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흑룡은 2002년 정보사를 퇴역한 뒤 북-중 접경지역에서 중국산 고추 수입업자로 위장해 제2의 첩보 인생을 시작했다. ‘서울○○물산’이란 상사를 차렸지만 실제로는 국가정보원 등과 협력하는 프리랜서 정보원으로 활약했다. 2010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대한 북한의 암살 시도를 막는 데 중요한 첩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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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가 비공개 판결문을 확인해 보도한 이른바 ‘흑룡 기밀유출 사건’은 마치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외교관 신분인 일본 무관들이 은밀하게 국내 군사기밀을 수집하는 방식이 밝혀졌다. 우리 측 첩보원이던 흑룡의 이중 스파이 행적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한중일 3국의 치열한 물밑 첩보전 양상도 드러났다.(본보 16일자 A1·5면, 17일자 A6면 참조)

첩보원의 암호명이 공개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암호명이 노출되면 그가 생산한 정보 루트가 모두 드러날 수 있어 첩보 인생에 있어서는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사업가로 위장한 첩보원이 상대국 정보기관에 포섭돼 우리 군 기밀을 넘겼다는 점에서 ‘흑금성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2003∼2005년 현역 육군 소장으로부터 입수한 작전계획5027 등을 북한에 넘겨준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흑금성’(암호명) 박채서 씨는 6년을 복역했다. 중국과 일본에 군사기밀을 넘긴 혐의(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등)로 수감된 흑룡 H 씨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이달 24일 항소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 계약서엔 첩보 등급별 대가 차등 지급

18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양중진)에 따르면 국정원은 2016∼2017년 중국에 파견된 정보사 요원의 명단 유출 사건을 내사하던 중 흑룡이 중국에 포섭된 정황을 파악했다. 한국인 사업가가 유독 군사정보에 눈독을 들이는 점을 수상하게 여기던 중국 정보당국에 정체가 발각됐다. 흑룡은 2016년 말경 중국 현지 정보당국에 체포된 뒤 ‘이중 스파이’로 변신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정보사 내통자를 통해 어학연수생 신분으로 파견된 우리 측 ‘블랙 요원’(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정보관) 명단을 빼내 중국에 넘겼다.

기밀 유출을 파악한 국정원은 감청과 잠복을 통해 흑룡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와 접선한 공작원을 색출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3년간 흑룡을 추적 감시하는 과정에서 베일에 싸여 있던 외교관들의 이중 플레이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올라왔다.

검찰은 일본 무관이 2015∼2017년 흑룡을 정기적으로 접선하며 총 54건의 군사기밀을 전달받은 내용을 확보했다. 일본은 흑룡이 건넨 정보가 우방국의 군사기밀임을 알면서도 서슴지 않고 빼갔다. 또 다른 정보원에게는 아예 “비밀자료를 SS, S급으로 나눠 대가를 차등 지급한다”는 비밀 거래 계약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 흘러간 비밀 중에는 ‘北, F국과 핵·미사일 기술 관련 교류 실태’ ‘G국 국방부의 최근 북한무기 구매 동향’ ‘A국 공군부대 현황’ 등 노출될 경우 외교 마찰과 첩보원이 노출되는 민감한 정보가 다수 포함됐다. 일본은 최근 한일 관계 경색의 기폭제가 됐던 대북제재 품목에 대한 정보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흑룡은 이를 넘겨주는 대가로 1920만 원을 챙겼다.

서로 협력하던 첩보원들끼리 속이고 동료의 정보를 몰래 파는 행태도 감지됐다. 북한 호위사령부 출신 탈북자 L 씨는 흑룡이 빼낸 정보를 대신 타이핑해주면서 저장한 파일을 자기 정보인 것처럼 일본 무관에게 팔았다.

○ 흑룡, 중국산 고추 수업업자로 신분 위장

흑룡이 중국에 포섭된 이후 국내 첩보 활동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위장업체를 이용한 정황도 드러났다. 수사당국은 흑룡이 한글 문서로 세탁한 군사기밀을 전달받은 이메일 주소가 ‘오리엔탈○○’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오리엔탈○○은 국내에서 20여 년간 북한 전문가로 활동했던 D 씨가 2015년 설립한 중국산 농산물 수입업체다. 흑룡의 아들이 이 회사 이사였다.

검찰은 흑룡이 2017년 D 씨를 만나 일본 무관에게 누설하려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물가동향 등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고 털어놓은 사실을 확인했다. 기자가 등기부등본에 나온 해당 업체 주소지를 찾아가 보니 주거용 오피스텔에 간판도 없이 문이 닫혀 있었다. D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H 씨의 권유로 중국산 고추 사업을 해보려다가 잘 안 됐다. H 씨가 오리엔탈○○ 사장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실은 알았지만 만나서 뭘 했는지는 몰랐다”고 했다. 흑룡은 정보사 후배에게 군사기밀을 빼낼 때도 D 씨와 국정원 산하기관 연구원에게 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정보를 빼낸 것으로 알려졌다.

군이 보안 통제를 위해 만든 군사기밀 전용단말기도 내부자 공조로 손쉽게 뚫렸다. 흑룡은 정보사 후배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로 군사기밀 단말기 화면을 찍게 한 뒤 이를 수기로 옮겨 적고 휴대전화는 없애는 치밀함을 보였다. 중국에서 어학연수생으로 신분을 속인 채 활동하던 정보사 요원들도 우리 편인 줄 알았던 흑룡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첩보 전장에서 대사관 무관처럼 신분을 밝히고 활동하는 요원(화이트)들은 스파이 활동이 드러나도 면책특권에 따라 주재국의 처벌을 받지 않고 추방되는 데 그친다. 반면 신분을 감춘 요원(블랙)들은 곧장 제거 대상에 오른다. 다행히 국정원이 사전에 신분 노출 정황을 포착해 해당 요원들을 재빨리 귀국시킴으로써 참극은 막았지만 이들이 수년간 쌓아온 중국 내 휴민트(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한 정보수집)의 기반이 무너졌다.

○ “첩보전의 구멍은 국익의 치명상”

첩보전의 최전선에 있는 현장 요원들은 상대 정보기관의 공작 표적 1순위다. 흑금성은 1997년 이른바 북풍 사건에 휘말려 신분이 노출된 뒤 북한 노동당 작전부에 포섭됐다. 흑룡도 오랜 첩보활동의 꼬리가 잡혀 중국 정보기관에 포섭당했다. 군 퇴직 후 민간인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사각지대에 놓였기 때문이다. 흑룡 사건의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판결문에서 “해외에 파견된 정보관과 현지 대상자(정보를 주는 사람)가 주재국에 포섭돼 이중 스파이가 될 위험성이 있다”고 밝혔다.

정착한 한국과 가족이 남아 있는 북한과의 경계에 사는 탈북자 역시 생계를 위해 정보 장사 유혹에 노출되기 쉽다. 이 경우 북한에 남은 가족과 인맥이 휴민트가 된다. 이번 재판 과정에서 L 씨 측 증인으로 나온 북한 고위층 출신의 탈북자는 판사 앞에서 휴대전화 두 대를 꺼내 보이며 “이 중 하나로는 지금 당장 북한에 있는 지인과 통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L 씨가 일본에 판 ‘장마당 물가’ 등 기밀의 출처가 흑룡이 아닌 자신이라는 얘기였다. 흑룡이 처음 L 씨에게 접근한 것도 유력 탈북자의 북한 내 학력 위조를 고발한 L 씨의 정보력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정원과 검찰이 흑룡의 이중 스파이 전모를 밝혀냈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냉전시대의 ‘간첩’ 개념에 머물러 있는 현행 법체계에 허점이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국가기밀을 해외로 빼돌리더라도 간첩죄를 적용해 형사처벌하긴 어렵다. 형법 98조는 ‘적국’을 위한 행위만 간첩행위로 본다. 국가보안법상 간첩행위는 반국가단체, 즉 북한에만 적용된다.

간첩죄 적용 범위를 ‘적국’이 아닌 모든 ‘외국’으로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의 경우 우방국인 한국에 군사기밀을 넘기더라도 간첩 혐의를 적용해 처벌한다. 산업 스파이도 ‘경제 간첩’으로 보고 엄하게 처벌한다.

우리 첩보원이 상대국에 포섭돼 수년간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고 2, 3급 군사기밀이 군 내부에서 유출돼 외국으로 넘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사례가 재발돼선 안 된다. 정보당국의 대응능력을 더욱 높이고 부실한 법체계도 손봐야 한다. 첩보전에서 빈틈을 보이면 그로 인한 후폭풍은 국익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동진 사회부 기자 shine@donga.com
#프리랜서 스파이#흑룡사건#한중일 첩보#흑룡 기밀유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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