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보다 그리웠던 건…” 노인이 된 파독 근로자들 의외의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7일 14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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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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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생활을 하는 노인들이 있다. 정원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바다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아랫마을의 외국인 선원들이 있다. 윗마을 노인들도 50여 년 전 아랫마을 외국인들처럼 고단한 세월을 보냈다. 밤에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잠들던 시절. 그 청춘들은 노인이 됐고 지금은 멋진 풍경이 펼쳐진 남해독일마을에 모여서 산다.

남해독일마을 아래에 있는 어촌에는 동남아시아인 선원 수십 명이 일하고 있다. 필자가 남해 해양문화를 조사하던 어느 날, 열대야를 피해 캔맥주를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그 때 외국인 선원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며칠 전 멸치잡이 어선을 타고 어업조사를 할 때 동승했던 선원이었다. 기다렸다가 맥주를 들고 다가갔다. 그는 휴대폰에 저장된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밝게 웃었다. 우리는 밤바다를 보며 캔맥주 두 개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그는 쉬는 날은 어김없이 인도네시아인 동료들과 고향 음식을 해 먹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윗마을 파독 근로자들도 50여 년 전 그랬다고 한다. 필자에게 서독 생활을 이야기 해주던 노인들로부터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 형제자매, 친구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음식에 대한 향수는 깊어지더란다. 독일에서는 한국음식을, 한국에서는 독일음식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걸로 봐서 혀의 기억은 머리나 가슴의 기억보다 오래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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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은 1950년대 중반부터 경제호황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다. 특히 자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인 광부와 간호사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였다. 파독 광부 첫 모집에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동아일보(1963년 8월 31일자)의 ‘좁은 루르 갱구(坑口)의 길목 광부’라는 옛날 기사 중 “경쟁 5 대 1, 20대 태반… 고졸만 50%”라는 내용에서 확인된다. 광부 선발 조건은 20~35세의 남성으로 1년 이상의 경력자였다. 그러나 실제 선발 된 인원 중 광부 경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 의하면 1963~1966년까지 전문대를 포함한 대학졸업자의 파독 비율이 24%였다. 당시 평균을 훨씬 웃도는 고학력자들이었다. 파독 간호여성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간호사는 전문직으로 선망 받는 직업이었으나 독일에서는 간병인 업무에 가까웠기에 기피 직종이었다. 1957~1976년 사이 여성 1만 명 이상이 독일로 건너갔다. 이들은 독일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동양에서 온 연꽃’이란 뜻으로 ‘로투스 블루메(Lotus-Blume)’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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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할 곳이 없어서, 형편이 어려워서, 외국에 대한 동경…. 이유는 달랐지만 서독행을 택한 청춘 남녀가 1만8000여 명이었다. 그들이 다시 한국의 남쪽에 있는 섬으로 재이주 해 노년을 보내고 있다. 독일마을 노인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서독 생활 초기의 고단한 삶, 그리고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좋은 추억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아랫마을의 외국인 선원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고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부디 한국은 멋진 나라였다고 가족에게 말할 수 있기를.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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