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춘들엔 평화, 시대의 부조리함 보다 따뜻한 위로 같은 노래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3일 15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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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나 작사가
김이나 작사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야윈 두 손에 외로운 동전 두 개 뿐.’ 가수 공일오비(015B)의 ‘텅 빈 거리에서’ 가사에서 우리는 이 노래가 발매된 때가 공중전화가 있던, 20원으로 한 통의 전화를 걸 수 있었던 시절임을 알 수 있다. 1990년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대중가요는 종종 타임캡슐 역할을 하기도 한다. 1992년 발매된 김건모의 ‘첫인상’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긴 머리 긴 치마를 입은 난 너를 상상하고 있었지만, 짧은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가 너의 첫 인상이었어.’ 소개팅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스타일의 상대가 나타났음을 말하는 한 줄이지만 요즘은 찢어지지 않은 청바지를 보기가 힘들다. 긴 머리 긴 치마의 여성은 더 보긴 더 힘들다. 쿨의 히트곡 ‘애상’에는 ‘삐삐쳐도 아무 소식 없는’ 연인에 대한 원망이 나온다. 피부에 닿는 듯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로 인해 대중가요는 타임캡슐 노릇을 하게 된다. 최근 발표된 딘의 ‘인스타그램’을 “그런 걸 하던 때였어?”라고 말하며 놀랍다는 듯 감상될 날도 언젠가 올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시대가 묻어나는 노래가 있는 반면 적극적으로 시대를 담는 노래도 있다. 전쟁에 지친 시대에 비틀즈의 존 레논은 ‘이매진’에서 종교와 국가가 없는, 그래서 싸울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를 노래했다. 이 노래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다. 저작권을 관리한 오노 요코가 가장 많이 받은 요청은 ‘종교도 없는(And no religion)’이라는 가사를 수정해 달란 것이었다. 논란은 세월을 지나 먼지처럼 흩어지고, 이매진은 지금 평화를 상징하는 가장 의미 있는 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태춘이 작사한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르포에 가까운 디테일을 담고 있다. 투쟁과 저항이 식어버린 서울 거리를 묘사하며 아쉬움을 표현한 이 노래는 정식 발매가 불가능했다. 정태춘은 당시 통제 시스템에 공식적으로 저항하는 의미로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앨범 발매를 강행해 불구속 기소되기까지 했다. 사전심의제도 철폐를 향한 움직임은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이 이어받아 마침내 마침표를 찍게 된다.

시대를 담아낸 가사는 시대저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뿐일까. 그렇진 않다. 1990년대 중반 호황 수많은 가요는 젊은이들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신해철은 ‘재즈카페’에서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등 ‘우리에게 오지 않은 것들’을 향유하는 공허하게 취한 풍경을 비판했다. 색종이는 ‘사랑이란 건’의 엔딩에서 내레이션으로 당시의 오렌지족을 나무랐다. 당시엔 씁쓸했던 노래인데 요즘에는 부럽기도 하다. 지나친 호시절로 인한 공허함이 문제였다니.

작사가는 시대의 결핍을 읽게 된다. 지금 세대가 원하는 메시지가 상업논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요구되고 반영되기 때문이다. 자이언티가 ‘꺼내먹어요’ 발매했을 무렵 개인적으로 애를 먹었다. “꺼내먹어요 같은 가사를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그 노래는 대단한 슬픔에 거창한 위로를 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냉장고에서 그 때 그 때 꺼내먹을 수 있는 작은 위로의 노래다. 이를 한 번의 현상이라 볼 수는 없는 이유는 이 노래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음악업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위로’이기 때문이다. 지금 세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지표다. 세계평화도, 시대의 부조리함도, 나의 오늘 하루 밥 한 끼 앞에선 무력하다. 요즘 청춘이 원하는 것이 이토록 작고 소박한 것임을 가요의 흐름에서 확인한다. ‘힐링’이라는 말이 길가에 뒹구는 전단지 같은 단어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에 대한 무수한 요구를 시장이 감지하기 때문이다. 힐링 토크, 힐링 강연이 성행이다. 사람들을 모아 앉혀놓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풍경은 따분할 법도 한데, 청년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는다. 그들은 어른다운 어른들의 위로와 조언을 듣기 위해 소비를 아끼지 않는다.

가요는 때론 저 하늘에 크게 띄워져야할 것 같은 평화의 메시지가 되거나, 밥상머리에 놓인 작은 쪽지 같은 이야기가 된다. 내게는 왠지, 작은 쪽지 같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마음들이 안쓰럽다. 별 것 아닌 위로 한 마디 건네줄 누군가의 부재(不在)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낯간지러워 건네기 어려워 한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존 레논의 이매진보다 큰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김이나 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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