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의 갯마을 탐구]〈26〉남의 집 살림살이 조사해 뭐 하려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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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연초부터 어촌에 거주하며 해양문화를 조사하는 필자는 여름만 되면 골머리를 앓는다. 주민들과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인 시점에서만 할 수밖에 없는 ‘별난 조사’ 탓이다.

바로 한 가정을 선정해 집안의 모든 살림살이 하나하나를 촬영하고, 개별 물건마다 배치된 위치, 입수 시기, 용도, 기능, 가격, 치수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일이다. 이 별난 조사에는 냉장고의 음식물부터 연애편지, 심지어 속옷까지 예외가 없다. 집안 내 물건뿐만 아니라 경작지 비닐하우스에 보관된 농기구, 항구에 정박돼 있는 어선과 각종 어로도구, 차량에 실린 물건 등 가족 구성원이 소유한 모든 살림살이를 조사한다. 조사원 3, 4명이 오전부터 저녁까지 매일같이 가족의 물건을 꺼내고 넣기를 반복한다.

이런 이상한 작업을 누가 쉽사리 승낙해 주겠는가? 오랜 설득을 통해 허락을 받아도 수많은 어려움이 기다린다. 막상 조사를 시작하면 주인 입장에서는 집안 구석구석에 놓인 물건이 눈앞에서 들락날락하고, 살림살이 하나하나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해 주려니 이만저만 성가신 일이 아닐 터. 하루가 멀다고 후회하는 주인을 달래가며 조사를 진행한다.

이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사용하는가를 밝혀서 물건의 의미까지 파악하기 위함이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영수증이나 작은 메모지가 어떤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매개가 되기도 한다. 사람과 물건 간의 특별한 관계는 시대와 공간과 사람을 이해하는 단서다. 살림살이 조사를 통한 기록물은 현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이기에 미래를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선원들이 거주하던 적산가옥(敵産家屋)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이 있었다. 창문 안쪽을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다양한 가구와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들로 가득해서다. 이 집을 조사하기 위해 수개월간 정성을 들였다. 집주인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으면 옆에 앉아서 말을 붙였고, 틈틈이 댁을 찾아 친분을 쌓았다. 그렇게 몇 달을 노력한 후에야 주인은 살림살이 기록을 허해 주었다.

그런데 조사하는 첫날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적산가옥 출입구는 각종 쓰레기에, 모든 방은 천장까지 쌓인 물건에 막혀 한 발짝 들여놓기도 어려웠다. 30여 년을 창고로 사용했으니 오죽하겠는가. 조사원 4명이 꼬박 일주일을 청소했다. 수십 년 묵은 먼지를 떨어내고, 바닥에 방치된 쥐나 벌레 사체 등을 치우고, 쓰레기를 치우니 8t 트럭 한 대 분량의 폐기물이 나왔다.

청소 후 물건 하나하나를 살필 때마다 감탄했다. 작은 건물 전체가 근현대사 박물관을 연상시켰다. 70∼80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랄까. 촬영과 기록을 끝낸 후에 적산가옥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 후 필자는 마을을 떠났고, 전국의 바다를 다니며 조사하느라 잊고 살았다. 부디 소중한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며 올해는 그곳을 다녀와야겠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해양문화조사#적산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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