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천황은 神이 아니었다’ 패잔병의 뼈아픈 고백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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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난 신/와타나베 기요시 지음·장성주 옮김/452쪽·1만8000원·글항아리

“나는, 이로써 당신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1942년 열여섯 살의 나이로 일본제국 해군에 자원입대해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와타나베 기요시는 4년 뒤 이 같은 문장으로 맺는 편지를 쓰고 고향을 떠난다. 장남이 아니어서 물려받을 것이 없어 스스로 살길을 찾고자 군대를 택한 소년이었다.

이 책은 ‘천황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자’ 싸웠던 와타나베가 패전 뒤 천황에 대한 허상에서 고통스럽게 벗어나는 과정을 그렸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인 줄 알았던 천황이 막상 전쟁이 끝난 뒤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에 와타나베는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천황을 신으로 떠받들도록 가르친 학교 교사, 전쟁 때는 입대하라고 부추기던 지식인들이 종전 뒤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부정하는 모습에 와타나베는 당황하고 좌절한다.

저자는 천황에 대해 느끼는 살의를 솔직하게 적으면서, 무책임한 천황을 광신적으로 믿었던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일본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과 ‘근세경제사상사론’을 읽으면서, 그가 받았던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자신 안에 천황의 허상이 만들어졌음을 깨닫는다. 평범한 개인이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은 저자 본인의 육성으로 담담하게 전달된다.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1946년 1월 천황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 자처한 적이 없다는 ‘인간 선언’에 이어, 3월 ‘천황은 국민을 통합하는 상징’이라는 헌법 초안을 맞닥뜨리고 와타나베는 ‘복무 기간 중 받은 금품을 돌려드린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쓴다. 이야기를 시작한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의 이 기록은 거짓 신앙을 강요했던 국가에 붙들린 과거와 싸워서 이겨낸 한 사내의 고백이자, 그 시대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산산조각 난 신#와타나베 기요시#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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